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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속의 우리 옛그릇 ⑦

조선시대의 접시

정충영(옛그릇연구회)

 
일본 말차(抹茶) 다도(茶道)에는 반드시 카이세키요리[懷石料理]가 나온다. 말차를 마시기 전에 주인이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자리로 보기 힘든 고도자기에 음식을 연출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분청사기나 백자접시들이 이때 단골로 등장한다. 또 말차를 마시기 직전 다식(茶食) 즉, 과자나 떡을 하나씩 돌리는데 이 접시들이 유용하게 쓰인다. ‘오객(五客)’이라 하여 보통 다섯 개를 한 세트로 맞추기도 한다.
이번 호에는 조선시대 접시들에 대해 알아본다. 조선시대 초기 특히 분청사기 가마터를 답사하다보면 흔히 발견되는 그릇이 대접과 접시들이다. 밥그릇, 국그릇, 반찬그릇 이 세 가지가 가마터 도편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의식용 제기나 특수 생활용기, 문방구 등은 매우 희소한 편이다. 우리 옛그릇의 제일 큰 장점은 실제 생활용기를 적극적으로 대량 생산한 데 있다. 따라서 과장된 장식이나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서민들의 일상생활에 어울리고 꼭 필요한 그릇들을 오랜 기간숙달된 장인들이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옛그릇들은 건강하다. 그릇이 힘차고 거침이 없으며 자연스럽다. 잘 만들려고 하는 의식이 전혀 없는 무의식의 아름다움이 배어난다. 오랜 기간 이 그릇들을 써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다. 쓰면 쓸수록 새로운 기운으로 맑게 변하며 쓰는 이로 하여금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접시라고 하면 다른 병이나 항아리 등에 비해 하찮은 물건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다. 크기도 작을뿐더러 언뜻 보기에는 볼품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접시를 만지고 사용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와 같은 생각을 당연히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만지고 써 본 사람이라면 조금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옛그릇의 아름다움을 좀 더 빨리 알고 싶다면 옛날 접시들을 몇 점 옆에 두고 써 보는 게 지름길이다. 일본 사람들은 이런 접시들을 늘 곁에 두고 쓰면서 조선 도자의 아름다움을 익히고 그 매력에 빠지곤 한다.
조선시대 접시의 흐름을 짚어보자. 조선시대 초기에는 고려시대 청자 가마가 퇴화하여 분청사기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조선 건국 후 관요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각 지방관아로부터 공납이라는 형태를 취하였는데 인수부(仁壽府), 장흥고(長興庫), 예빈(禮賓), 사선(司膳), 내섬(內贍)등의 명문(銘文)이 그 예(例)다. 또 그릇에다 지방(地方)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경우도 있다. 김해(金海), 양산(梁山), 울산(蔚山), 경주(慶州), 삼가(三嘉) 등 주로 경상도(慶尙道) 지방의 지명이 많다.
아마도 그 당시에 궁궐의 용처에 따라 지역 안배가 있었던 것 같다. 조선이 국가로서 틀을 확립하면서 중앙관요도 완성되었다. 대체로 성종 무렵(1460년대) 사옹원 분원이 자리를 잡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 이전에 부분적으로 관요에서 도자기를 공급했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시대 초기 관요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로 순백자를 들 수 있다. 그릇의 선은 엄격, 단정하여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 마무리도 깨끗하여 선비가 도포를 입고 꼿꼿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불교의 화려한 색상을 뒤로하고 조선의 색상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조선의 국시(國是)가 성리학에 바탕을 두면서 장식적인 기능을 배제하고 기능적이며 상징적인 그릇을 많이 만들었다.
전접시가 아니더라도 유수한 초기 관요의 그릇들은 대부분 백색 일변으로 한결같이 단정하고 위엄이 있다. 참고 사진 접시 세 점은 조선 초기 관요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둘째로는 청화백자의 등장이다. 백자에 청화안료 그림을 그린 것은 원(元)나라 때부터다. 명(明)나라의 선덕(宣德) 연간에 와서는 그 절정을 이룰 정도로 기술이 발달하였다. 조선과 명나라의 대외관계가 지속되면서 자연스럽게 백자의 기술과 청화의 수입이 있었다. 그 당시 청화안료는 금싸라기보다 귀한 재료로 중국에서 조차 만들지 못하여 대부분 아랍에서 수입되었다.
조선에서도 중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당당하게 청화자기를 생산하였다. 대량 생산체제는 아니었지만 고품질의 자기를 생산한 것 자체가 세계 도자사에 있어서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소메[古染]’라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초기 관요의 청화백자는 전하는 숫자가 너무 적어 쉽게 구하기도 힘들고 가격은 정해진 것이 없을 정도로 비싸다. 청화 전접시는 세계에 몇 점 안 되는 것 중에 하나로 현재 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일본에는 오사카 동양도자시립미술관에 한 점, 개인이 한 점 소장하고 있다. 한국 도자기의 희소가치를 익히 꿰뚫고 있는 일본인들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15세기 관요 청화 백자를 대부분 선점하여 그들의 미술관에 소장시켜 꼼짝도 못하게 붙들어 놓고 있다. 관요와 별도로 조선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영향이 남았던 탓인지 지방 요에서 만든 경질 백자류 접시와 분청사기 계열의 접시는 비교적 많이 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접시의 종류가 단순해지고 그 숫자가 많지 않아 보인다.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 전쟁의 연속으로 관요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고, 물자와 식량의 부족이 산업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도 도자기에 관한 것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다가 숙종(肅宗, 1661~1720) 무렵부터 관요가 자리를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은 명나라가 망함에 따라 조선 자체의 주체의식을 강하게 지니며 오랑캐 나라인 청국(淸國)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연히 중국에서 들어오는 대외문물이 차단되었고 그 중에서도 도자기 안료도 공식적으로는 입수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꿩 대신 닭이라고 했던가. 청화 안료를 대신해서 철화 안료를 썼다. 이때 만들어진 그릇의 대부분이 철화다. 궁중에서 쓰는 그릇도 예외가 아니어서 철사로 그린 용문양도 이때 많이 보인다.

《차의 세계》2008년 7월호 참조

기사 작성일 : 2008-08-22 오후 2: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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