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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에 흐르는 茶香 ②

마음에 찻물이 들다

노준옥(시인)


“이 차 누가 만들었어요?”
지인(知人)의 차실에 들러 차를 마시다가 앞에 앉은 이에게 불쑥 내가 묻는다. 직접 만든 차이지만 전혀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맛과 향으로 다가오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고 내가 아닌 듯한 낯선 모습에 “너 누구니?”하고 물어보듯이.
가을이 오려는지 아침저녁 서늘한 기운에 마음을 추스르며 차 한 잔을 마신다. 가을에는 차맛이 깊어진다. 정말 이 차는 누가 만드는 걸까? 누군가 새삼 물어온다면 길고도 긴 대답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저 구름들이 바람들이, 주위의 많은 천신(天神)들이 지신(地神)들이, 빗소리 물소리가, 산비둘기의 울음소리가, 정이 많은 여인들이, 이름 없는 할미들이, 소나무껍질 같은 손들이, 신경통으로 저린 팔다리들이, 낫처럼 휘어진 허리들이, 열무처럼 싱싱한 종아리의 처녀들이, 여인들의 순박한 미소와 땀방울과 눈물이, 그네들의 장단 없는 노래들이, 해지도록 끝나지 않는 이야기들이...... .”
내게 차는 고상한 것이 아니다. 뙤약볕에 농사를 지어 밥상에 올라오는 한 그릇의 밥 같은 것이다. 깊은 샘에 두레박을 내려 길어 올린 한 바가지의 물 같은 것이다. 밥이 되고 물이 되고 옷이 되고 시가 되고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 차이다. 진짜 농사꾼에겐 부끄럽지만, 말하자면 나는 농사꾼이다. 농사꾼의 자질과 품성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해 어설픈 한철 농사꾼, 나오는 것이 없어도 그 일을 그만두지 못하는 농사꾼이다. 그러나 차에서 꼭 나오는 것이 한 가지가 있다. 순간순간 복잡하고 구질한 일상을 초월하는 힘이다.
차를 만들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일들을 겪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의 느낌은 사람과 자연에 대한 절실한 고마움이다. 차를 좋아하고 차를 잘 아는 사람과 함께 일을 하면 차를 소중히 여기니까 고맙고, 차를 잘 모르는 사람은 설렘과 호기심을 가지고 차를 순수하게 대하는 모습이 좋다. 차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함께 차를 만들면서 차와 새로운 인연을 맺기도 한다.
차는 세심한 잔소리로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차가 만들어지려면 마음을 맞추어 같이 해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차의 성품이나 차를 만드는 원칙을 전부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잔소리를 싫어한다. 나 또한 그렇다. 혼자서 하는 일이 훨씬 편하고 익숙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고집으로 일을 하기 때문이다. 순종하거나 하심(下心)하는 마음이 없어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반은 듣고 반은 듣지 아니한다.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한 가지 일을 하는 데는 한 가지의 깨우침이 따른다. 그것은 불화(不和) 속에서 화(和)이며 조화(調和) 속에서의 부동(不同)이 아닐까 싶다. 차를 마시러 사람들이 오두막으로 찾아온다. 가끔씩 차 만드는 사람들도 뭔가 새로운 제조법이나 특별함이 있는가 하고 기웃거린다. 하지만 제다법에는 특별함이나 새로움은 없다. 미련하리만치 원칙을 지키고 마음을 다해 정성으로 만들 뿐이다.
시를 쓸 때는 시 쓰기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같이 느껴지는데 차 만들 때는 차 만들기가 그렇다. 정신적인 에너지는 물론 육체적인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일인 탓이다. 또 감각을 총동원해야 하는 지극히 섬세한 일이고 그 동원된 감각들을 다시 잘 다스려야 하는 일이다.
차를 만들고 차를 마실 뿐, 아직도 차를 잘 모른다. 찻물이 더 들어야 한다. 겨우 스무 해 동안 스무 번 밖에 차를 만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흔히 시인이 되려면 시 삼백 편은 써봐야 한다고 주문한다. “시 삼백(詩三百)에 일언폐지(一言蔽之)하면 왈(曰) 사무사(思無邪)니라”라는 구절도 있듯이 시 삼백 편을 마음에 꿰차고 나면 삿된 생각이 깃들래야 깃들 수 없을 것 아닌가.
사특함이 없어야 하는 건 차도 마찬가지다. 차 300잔 마시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차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만들려면 적어도 300번은 만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해마다 새록새록 햇차를 만나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300년이 걸린다.
티벳에는 ‘징번(經幡)’이라는 오색 깃발이 있는데 룽다와 타르초로 구분된다. 룽다는 ‘바람의 말’이라는 뜻으로, 긴 장대에 매단 한 폭의 길다란 깃발이며 타르초는 긴 줄에 정사각형의 깃 폭을 줄줄이 이어단 것으로 만국기 형태의 깃발이다. 이것은 티베트 불교의 상징으로 깃발에 옴마니반메훔 같은 만트라나 경문을 적어 집과 거리 곳곳에 달아 인간의 소망을 바람에 실어 신에게 전한다고 믿는다. 진리가 바람을 타고 세상 곳곳으로 퍼져서 모든 중생들이 해탈에 이르라는 히말라야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것이다. 그래서 룽다의 천으로 된 깃발은 형체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대로 놓아둔다고 한다.
섬진강변에는 나만의 룽다, 나만의 타르초가 펄럭거리고 있다. 차를 만들며 무시로 강으로 내려가 세운 그 색색의 깃발들은 비바람에 시달려 끝이 하얗게 바래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것도 있고 어떤 것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 깃대만 남은 것도 있다. 그러나 찻잎을 따다가, 차를 덖다가 조각조각 깃발에 새긴 어리석은 나의 말들은 아직도 찻물이 밴 채로 강가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차의 세계》2008년 9월호 참조

기사 작성일 : 2008-09-17 오후 3:4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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