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핫이슈

 뉴스초점

 기획특집

 연재

 출판

 소식

 포토뉴스

 타매체 소식

 

 

선의 메아리

꼭 견성성불이 실현될 이유 Ⅰ

능가(범어사 내원암 회주)

이 글은 《사자후》(불교춘추)에 수록된 능가 스님의 〈견성성불(見性成佛)의 길〉 중에 일부분입니다. 이 글은 “왜 견성성불을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불교에 입문하면 견성을 해야 한다, 성불을 해야 한다고들 하는데 견성성불이 실현하게 되는 이유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알아봅니다. 불교에서의 견성성불론은 빼놓고 철학적인 사고방식에서, 심리학적 측면에서, 물리학적 측면에서 견성성불이 될 수 있는 것인가를 2회에 걸쳐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철학적 측면에서 볼 때
그럼 왜 견성성불을 실현하게 되느냐 하면, 어느 모로 보아도 인간은 견성성불이 꼭 되게 되어있다는 점을 먼저 확신해 주기를 바랍니다. 관심만 가져도 견성성불은 큰 어려움 없이 일찍 되는 것입니다.
옛날 스님네들은 선방에서 12시간 ‘이뭣고’ 하고 참선만 하고 또 이렇게 해야지 성불을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효율적으로 빨리 성불을 할 수 있게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안 한다고 해서 성불을 못하느냐 하면 그런 건 아닙니다.
인간이 꼭 성불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철학적 측면에서 검토해 보겠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주의 진리는 세 가지 내용으로 보게 되는데 ① 대우주는 하나의 세계다 ② 삼라만상은 동(한 가지 동)의 세계다 ③ 개체 생명은 영원한 세계다라고 했습니다.
이 광대무변한 삼라만상은 제각기 놀아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로서, 동(同)의 세계로서, 영원한 세계로서, 유기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운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태양계는 46억 년 전에 생겨서 9개의 행성과 행성을 돌고 도는 많은 위성을 거느리고 은하계를 질서정연하게 운행하고 있습니다. 곧 수많은 위성은 하나의 행성을 중심으로 돌고 돌며 또 그 행성은 많은 위성을 동시에 거느리면서 다시 태양을 돌고 도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는 이 태양계는 이 지구를 포함하여 모두 아홉 개의 행성과 그 각각의 행성을 돌고 있는 위성을 동시에 거느리며, 자신도 은하계를 중심으로 돌고 돕니다. 그리고 그 하나의 은하계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억만의 태양계를 동시에 거느리면서 또 다시 대은하계를 돌고 도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현대 망원경 기술수준으로 발견된 은하세계만도 2163개에 이르고 있으며 그 직경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놀랍게도 70억 광년이나 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넓은 크기입니다. 그런데 그 무수하고 광대한 대우주집단 하나하나가 정칙적이고 유기적인 운행으로 자전(自轉)과 공전(公轉)을 하고 있되 추호의 착오없이 질서정연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질서’라는 것은 근거없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어떤 ‘법칙’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법칙이 있게 된 후에 법칙대로 움직이다 보니 그것을 ‘질서’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족함이나 남는 것 없이 완전한 ‘조화의 힘’으로 상의상조한 그 법칙은, 상관관계로 형성된 ‘조화의 힘’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조화의 힘’을 비롯한 ‘법칙’성이나 ‘질서’성은 어떤 ‘대지혜’의 불가사의한 존재의 배려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바꾸어서 말한다면, 불가사의한 ‘대지혜’의 힘으로서만 ‘조화’가 형성될 수 있고 그 조화의 힘은 일정한 ‘법칙’으로 형성된 것이며 그 법칙은 ‘질서’ 정연하게 우주 전체의 삼라만상이 운행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불가사의한 ‘대지혜’에 대해서는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어떻게 형용해야 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이에 대해서는 절명언(絶名言)이라고만 해왔을 뿐입니다.
이 ‘대지혜’의 앞에서는 중생과 불(佛)이 따로 없고, 천차만별한 일체만물이 평등하고 원만하게 배려된 조화의 법칙 앞에 높이게 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대지혜’ 속에 놓여있는 우리 중생이 누구나 같은 조화, 법칙, 질서 속에 포함되어 운영되어지고 있는 한 그 원칙에서 이탈되거나 포기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원하건 원하지 않건 서서히 완전한 것으로 향하여 진화하고 발전하여지도록 마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절명언의 불가사의한 것을 고인들은 마음이라 했고 신이라 했으며 혹은 진여라 했고 또는 법 또는 불이라 했던 것입니다. 육조 스님도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이름과 문자가 붙을 수 없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달마 스님은 이 대지혜의 작용과 그 작용에 지배된 인간에게 말씀하시기를 도본원성이니 진리란 원래 원만하게 성취되어 있는 것이니 별도로 닦고 증득할 것이 새삼 없느니라 했습니다. 규봉종밀(圭峰宗密) 스님도 자기의 참성품이 원래 스스로 원만하게 완성되어 있는 바 세간에 이루어진 모든 것이 또한 본자원성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면으로 보아도 특히 철학적 견지에서 볼 때 누구나 원하건 원하지 않건 성불은 꼭 되고야마는 것이 우주진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점을 좀더 자세히 알기 쉽게 이야기 해보아야 겠습니다.
앞서 보아온 것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우선 천지만물의 운행을 볼 때 조화가 있다고 하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모르니까 조화라는 말로 부를 뿐입니다. 모르니까 질서가 있고 질서라는 것은 법칙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이 법칙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곧 천지만물을 조화롭게 형성해가는 어떤 지혜의 주인공이 만들었다 함이 옳겠습니다. 없는 사람한테는 보태주고 있는 사람에게는 내어놓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상의상존하게 하는 조화의 위력이 곧 지혜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조화는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아주 지극히 총명한 큰 지혜가 아니고서는 그렇게 안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령 여러분들 중 여기 5형제 아들을 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5형제를 키우려면 골치가 많이 아플 겁니다. 그러나 골치가 아무리 아파도 먼저 해줄 놈, 나중 해줄 놈, 선후와 경중을 가려서 대응하는 것은 이 모두가 어머니의 지혜가 생각하는 조정과 배려라 할 수 있지요. 그저 이놈 저놈 해달라고 한다고 분별없이 해서 좋다, 가져가라 하면 그 집안이 되겠습니까? 부모 입장에서는 머리를 짜고 짜서, 아무리 5형제가 아니라 8형제가 제 나름대로 조르고 짠다 해도 너는 그렇게 급할 것 없잖아, 너는 모레 해도 돼, 당장 급한 애는 이 애야, 그리고 내 일은 저 애야, 그리고 너는 모레쯤 해도 늦지 않아 하는 식으로 조화롭게 생각하는 지혜가 있어야 그게 원만하게 영위되어가는 집안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우주도 마찬가집니다. 삼라만상 하나하나의 개체는 제 나름대로의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산천초목도 마찬가지요, 큰 나무, 작은 나무, 잎사귀 넓은 것, 좁은 것, 물이 많이 필요한 나무, 적게 필요한 나무, 또는 동물도 마찬가지 한놈 한놈이 모두가 각양각색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조화있게 다스려가는 힘을 대우주의 지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지혜’지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까 이 같은 대지혜가 전제되어야 ‘조화’를 상상할 수 있고 조화는 뒤죽박죽이 아니라 질서정연한 정상상태를 유지발전함에 추호의 착오가 있을 수 없게 원만하게 해낼 수 있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 ‘대지혜’를 무엇이라 표현해야 좋으냐 하면, 이것은 불가사의한 존재다라고 하겠습니다. 귀신 믿는 사람은 귀신인가 하겠지요. 너무나 조화를 완벽하게 잘 형성해 나가니까. 그러나 이것은 보통 지혜가 아니라 ‘절대적인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같은 대지혜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만약 하나님 믿는 사람은 천지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이라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부처님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무엇이라고 할 수 없으니 부처님이라고도 하고 하나님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다 말 안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석가모니도 《화엄경》을 많이 설법하시고 《법화경》을 설법하시고 일대시교를 설법하시고도 중생들이 말에 끌려서 말의 포로가 될까봐 “나 지금 설법한 것 아무 것도 없어” 하시고 나중에는 싹 씻어버리시지 않았습니까. 말만 뭐라고 하면 중생들은 말의 포로가 된단 말입니다. 막걸리가 시원하다고 하면 막걸리만 보면 시원하다는 생각을 가지며 나중에는 에어컨 앞에 가서도 시원하니까 그것을 막걸리로 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막걸리라는 것은 무엇이냐, 여름에 먹으면 시원한 것이다 하고 설하면, 중생은 시원하다는 말에만 집착이 될까봐 걱정이 되시니까, 지금 말한 것은 아무 말도 한 것이 아니다라고 끝에 가서는 꼭 그렇게 하셨습니다.
다시 앞의 얘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법화경》에서는 불가사의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나 불가사의한 것도 말 안 되는 것이고, 신이라는 것도 말 안 되고, 그러므로 조사스님들은 그건 이름과 말이 떨어진 곳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관념적으로 표현할 수도 없고, 글로 쓸 수도 없고, 그건 아예 말의 길이 끊어진 곳이다 이 말입니다. 그것을 뭐라고 표현할 수 없습니까, 또 어떤 스님은 천지가 갈라지기 이전 소식이다, 천지만물이 벌어지기 이전 상태의 소식이다 이렇게도 말을 했습니다만, 우리가 지금 생각해보아도 과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것을 육조 스님은 유일물(有一物)하니 무언가 한 놈이 있는데 그 하나가 대우주의 지혜를 작용하는 무언가 하나가 있기는 하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대지혜라고 말해도 안 되는 게지요. 대지혜라고 하면 사람 생각보다 조금 나은 그런건가 보다 하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이 못난 중생들이……. 그러니까 지혜라고 붙일 수도 없고, 그러니까 천지미분 이전의 소식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또 우리나라 서산 스님 아시죠. 사명 대사 스승이신 분 말입니다. 그분도 똑같은 얘기입니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종본 이래 소소영영(昭昭靈靈)이라(이 우주가 생기기 전부터 지금까지 항상 또렷또렷하게 소소영영한 것이라) 했습니다. 지혜라는 것은 여간 또렷또렷한 게 아닙니다. 희미하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그런 사고방식으로 대우주를 조화있게 운행할 수 있겠습니까? 한 가정도 조화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백 퍼센트 총명을 가진 지혜가 아니면 이 방대한 대우주에 천자만별한 그 무수한 삼라만상을 각각 제 나름대로 충분히 살 수 있게끔, 그리고 충분히 제 권리를 보장할 수 있게끔 배려를 해서 질서를 부여하고 법칙을 부여하고 조화를 하고 이렇게 해주는 지혜가 보통의 지혜냐 이겁니다. 이 우주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것이고 이 우주가 영원히 없어져도 그것만은 없어지지 아니하는 영원불변한 이러한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있으면 여러 가지 얘기를 하려고 했으나 시간이 다 지나가, 대충 철학적인 견지에서 본다고 해도 그 무엇인가 하나 있는 것, 이것을 빼놓고 살 수 없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뭐가 있다는 그 하나를 도외시 하고, 그것을 배척하고,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사람이 건전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나가 있다는 이것을 착실히 믿고 이에 의지하는 생각은, 자기를 대우주의 법칙에 맞추어서 살아가기 때문에 마치 종로 네거리에서 교통질서를 잘 지켜 어느 누구하나 털끝하나 건드릴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이, 이 우주의 대진리에 맞추어서 사는 사람은 이러한 자유와 행복이 보장된다 이겁니다. 또 이것이 일보 일보 견성으로 가는 대명정도입니다.
그러니 철학적인 면에 있어서도 성불은 기어코 아니 될 수 없고, 또 되어질 수밖에 없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이겁니다.

2. 심리학적 측면에서 볼 때

이제 심리학적 측면에서 보는 성불되는 경위와 증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교 심리학이랄까, 불교에서는 마음을 아홉 가지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6식과 그 외 7식, 8식 그리고 9식이 그렇습니다. 보다 정확히는 6식과 말나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 아마라식(阿摩羅識)이라 합니다.
그런데 현대 심리학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6식, 7식을 ‘현재의식(顯在意識)’이라 합니다. 보통 우리끼리 현실적으로 말똥말똥 보는 의식, 이것이 현재의식이고, 8식을 아뢰야식이라고 해서 ‘잠재의식(潛在意識)’으로 보는, 최근 심층심리학(深層心理學)이라고 아주 깊이 파묻혀 있는 그 심리를 발굴해낸 학설입니다. 이 심층심리학에서는 불교의 ‘아뢰야식’ 곧 8식을 잠재의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의식과 잠재의식 속 그 밑에 깊숙이 깔려있는 의식을 ‘초재의식(超在意識)’이라고 합니다. 현재의식과 잠재의식을 초월해서 있는 의식입니다. 이것이 곧 불교에서 말하는 아마라식이라 합니다만 보통 쉽게 9식이라 부릅니다.
이 아마라식을 불교적으로는 무엇이라 하느냐 하면 부처님이다, 여래다, 진리이다, 진여다, 자성이다, 법이다라는 등 가지가지로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성불이다, 견성이다 하니까 우리가 현실적으로 갖고 있는 것 외에 어떤 것이 우리를 덥석 덮쳐 별안간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그것이 아닙니다.
보통 인간은 자신이 의식을 했건 못했건 간에 현재의식만 가지고 생활하다가 잠잘 때는 현재의식은 간데없이 잠재의식만을 가지고 있게 됩니다. 이러한 생활을 ‘잠재의식 생활권’이라고 합니다. 그 잠재의식은 낮에 있었던 현재의식의 배경역을 하지요. 그런데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그 잠재의식 밑에는 또 초재의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면 성불하는 공부를 하건 안 하건 저절로 성불이 되어지는 것이라는 말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것을 이해 못하면 안 됩니다. 이해 못하면 세세생생 고생만 잔뜩 한 후에나 성불하게 될 것입니다.
불교는 전부 마음의 논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불교라는 것은 마음공부요, 마음공부라는 것이 곧 의식층에 대한 공부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현재의식만이 생각하는 전부라고 알고 있으며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 현재의식으로 미운 것도 좋은 것도 있어서, 나한테 잘하는 사람은 좋고 나한테 못하는 사람은 밉다고 생각을 합니다. 설사 복수는 못해도 저 놈 밉다 하는 그 생각은 그대로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갑니다. 잠재의식이라는 것은 ‘함장식’이라고 해서 함축해 놓는 의식창고 같단 말입니다. 그러면 현재의식은 경계를 받아들이는 접수창구와 같아서 현재의식에 모든 것을 접수합니다. 누구든지 눈만 뜨면 현재의식이 발동하게 되고 여기서 접수되는 대로 잠재의식 속에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이 쌓이는 것은 금생의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생, 전전생의 수억 년 전부터 쌓여져 내려온 겁니다. 그래서 그 창고에 꽉 들어찼던 오랜 현재의식의 짐이 잠재의식으로 도사리고 있다가 기회를 보아 즉흥적으로 바로 창고에서 나와 또다시 현재의식화된다 이겁니다. 튀어나오는 형식은 현재의식을 통해서 튀어나오는데 그 순서는 빈도가 잦은 것에서부터 또는 강도가 강한 것부터 나오고 혹은 전전생에 들어갔던 것부터 먼저 나오고 나중에 들어간 것은 나중에 미루어지긴 하나, 조건에 따라 강도 높은 안건이 먼저 튀어나오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빼내어 쓰는 잠재의식이 전생인지 금생의 어려서 저장된 것인지는 현재의식 갖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쨌든 현재에서가 아니고 과거에 원인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연찮게 공연히 어떤 사람이 미워보이면 그건 나도 모르게 전생부터 내 잠재의식 속에 뭔가 그 사람과 나쁜 관계가 있었던 탓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보게 되자 잠재의식 속에서 그것이 튀어나와 현재의식화 한 것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제삼자한테 말을 하지 않고 감추고 있다 하더라도, 좋은 생각을 가진 것은 좋은 생각 그대로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가 쌓이게 되고 또 한 번 들어가면 언젠가는 반드시 현재의식을 통해 튀어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잠재의식이라고 하는 창고는 받아만 놓고 있지 왜 튀어나오느냐 이 점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 밑에 깔려있는 초재의식이 가만히 있지 않고 항상 자정작용, 정화작업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초재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청정무구해서 선도 없고, 악도 없어서 착한 것도 악한 것도 원치 않습니다. 청정무구한 백지상태를 유지하는 본질을 가진 그것입니다. 청정무구한 그 밑바닥 위에 지저분한 것, 착한 것, 악한 것, 옳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라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이 가감없이 다 들어가 쌓이므로 밑에서는 선도 악도 싫어하고 배격하여 내민다 이겁니다.
이 청정한 것은 청정한 제 모습대로 자정(自淨)작용으로 제 생리대로 유지하자니까, 무엇인가 눌리는 것이 있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밖으로 밀어냅니다. 내보내니까 먼저 들어간 것은 먼저 나오고 나중에 들어간 것은 나중에 나오지만, 걸리는 것이 있으면 어제 들어왔다 해도 먼저 내보내기도 합니다. 심리라는 것이 이렇게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신심을 가져라 말하지 않았습니까? 가령, 기독교 같은 데선 신앙을 가져라 하고 유교에서는 신의를 가져라 합니다. 불교에서의 신심이란 말은 마음을 믿어라 이 말인데, 이 말은 오염덩어리인 ‘현재의식’이나 ‘잠재의식’을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믿어라 하는 그 마음은 ‘초재의식’, 곧 ‘아마라식’을 믿어라 이 말입니다.
부처님한테 절하고 무얼 갖다 바치는 것이 신심인줄 아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게 모두 업짓는 것이요. 달마 스님, 육조 스님들이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임제 스님 같은 분은 극단적으로 살불살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고 그리고 나한도, 부모도 모두 죽여버려야지 성불한다 했으니 분별의식인 현재의식이나 잠재의식 작용을 모두 없앨 수 있고, 그걸 모두 없애버려야 ‘초재의식’에 부딪친다 이것입니다. 초재의식에 부딪친다는 뜻은 견성성불한다는 뜻입니다.
분별망상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선과 악, 옳고 그른 것이 있을 뿐이지 청정무구한 초재의식에서는 그것은 모두 전도망상의 씨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초재의식의 영향권 내에 직접 들어선 생활이 견성하는 생활이다 이 말입니다. 초재의식권 내에서 사는 사람이 곧 도인이요, 도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인간이 일상생활에서 결정하고 좌우하는 것이 전부 현재의식만으로 된다고 합니다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결정 및 행동은 그 사람이 과거부터 쌓아놓았던 잠재의식의 작용이 95%로 되어있다는 것이 심층심리학자들의 주장입니다. 잠재의식이라고 하는 것의 작용이 일상생활의 95%를 점령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눈을 뜨고 현재의식으로 내가 생각하고, 추리하고, 결정하고 하는 것은 의식 폭에 5%밖에 안 된다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이 오늘 법안정사에 와서 법문을 듣는 이것도 잠재의식 95% 가운데 들어있는 것이며 전생에서 그 잠재의식 창고에 들어있던 것이 나왔기 때문에 법문을 들으러 아니올 수 없었단 말입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 훌륭하다, 훌륭하지 않다 하는 것도 그 잠재의식 속에 들어있는 것 중 좋은 것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문제로 계산이 되겠습니다. 이제 이 잠재의식 역할이 무엇인지 대강 이해가 되겠습니까? 바닷물 맨 위의 물은 현재의식입니다. 수면은 흐르고 바람타고 파도칩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볼 수 있고 떠갈 수 있습니다. 그 중간층은 잠재의식이라 할 수 있으며 맨 아래 해저층은 초재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저층 바닷물은 절대 움직이지 않습니다. 중간층은 조류를 형성하여 흐릅니다.
진여불성이 무엇이냐 하면 맨 밑에 깔려있는 해저를 초재의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심왕경》을 보면 “진여불성이 지식과 육견에 파묻혀 있다”고 했습니다. 지식육견이란 현재의식과 잠재의식을 말하는데 감각적인 현재의식이나 잠재의식이 초재의식을 꽉 누르고 파묻고 있다 이 말입니다. 맨 밑에 있는 초재의식이 침륜생사하며 낳고 죽었다 하는 현재의식 또는 잠재의식에 짓눌려 맥을 못 추는 사이에 전생, 금생 이렇게 생사를 반복한다 이겁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초재의식의 영향은 하나도 받지 않고 그것을 환영할 생각도 아니하고 그 존재가 있다는 것까지도 느끼지 아니하고 현재의식 또는 잠재의식만 가지고서 똑똑한 척하고 살아가는 이러한 인생이 되어버렸으니 한 발자국도 깊이 들어갈 수 없고, 그러니까 생사생사한다고 해서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심왕경》의 말씀입니다.
이 같은 심층심리학을 이해하면 견성하기가 빠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이니, 학설이니, 정치경제니 하는 것이 결국 어느 심리권이냐 하면 이것은 현재의식권입니다. 혹 학자들이 잠을 안 자고 생각하다가 무언가 절대자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잠재의식 속에 들어있던 것이 툭 빠져나오는 발작현상인 것입니다. 잠재의식이라고 하는 창고에 전생에서의 생각과 행동이 현재의식 속에 차곡차곡 쌓였다가 튀어나오는 것을 계시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모 종교에서 계시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부 귀신 들렸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알아듣겠습니까?
또 《십지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중생신중에 유금강불성하니, 중생의 몸 가운데 금강같은 불성이 있으니 둥근 해와 같으며 그 체는 원만한 명월과 같도다” 하였습니다. 금강이라고 하는 것은 수억만 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빛나는 물건이므로 불성을 금강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한 금강의 불성이 달과 같이 원만하게 깊이 숨어있다 이 말입니다. 너희들이 보통 변화무쌍한 현재의식이나 잠재의식권에서 똑똑한 척하고 살고 있지만 그 속에는 영원히 변치않는 초재의식권이 의젓하고 보배스럽게 깔려있으니 하는 소리입니다. 그것은 해와 달과 같아서 그 작용이 원만하고 완전하며 매우 지혜로워서 철학적 견지에서 말한 바와 같이 대지혜로 조화를 형성하여 어떤 한 놈 한 놈의 역할이 곧바로 우주의식의 작용인 것입니다. 사람으로 볼 때는 이것이 초재의식이지만 우주적인 입장에서 표현할 때는 우주의식입니다.
육조 스님 말씀에 심유생멸하니(마음에는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것이 있으니) 이 마음은 현재의식과 잠재의식을 가르치는 뜻이요, 벌써 생각이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는 사람은 현재의식이 잠재의식권 내에서 사는 사람이니 범부라, 그러므로 순간순간 찰나찰나 내 말이 변하니까 여러분의 마음도 이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번개같이 변한단 말입니다. 그것을 생멸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멸이 있는 생각이 범부라 이 뜻입니다.
심무생멸은 즉비범부라. 생멸이 없는 마음은 가령 중생세계에 있다 해도 중생이 아닙니다. 그건 변화무쌍한 현재의식이나 잠재의식의 영역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있는 영원불변한 초재의식권에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초재의식을 배경으로 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몸뚱이는 세속에 놓여있다 해도 범부가 아닙니다. 견성을 한 사람입니다. 인간본성을 터득하였으니 견성한 사람이요, 또한 성불한 사람이라 그는 이미 보살이요, 불입니다. 이렇게 얘기해도 어렵습니까?
예수의 말을 한마디 인용하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네가 너에게 반역하지 아니하면 너는 네 편이 되느니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들은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모를 겁니다. 네편 네편 하니까 현재의식만을 가지고 사는 사람 ‘너’를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의식권인 인간을 너라고 해석할 때엔 말이 막힙니다. 논리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네가’는 현재의식과 잠재의식만을 활용해 가지고 있는 너를 지칭한 뜻이고, ‘너에게’는 현재의식의 뿌리인 초재의식을 지칭하는 뜻으로서 변화무쌍한 현재의식권 ‘네가’초재의식인 ‘너’를 반역, 곧 순종치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서 만약 현재의식이 초재의식을 순종하고 반역을 하지 않으면 현재의식을 쓰는 너는 곧 초재의식을 쓰는 네가 되느니라, 곧 순간순간에 사는 현실생활이지만 그것이 곧 영원한 생활이 되느니라 이 말입니다.


《차의 세계》2008년 9월호 참조

기사 작성일 : 2008-09-24 오후 2:01:52
기사에 대한 덧글 등록된 덧글 : 0개
이 기사와 관련하여 등록된 덧글이 없습니다.
 
작성자  
제목  
덧글 내용  
비밀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