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僧 譜 (45) - 불조원류 嗣法傳燈으로 면면히 이어가는 佛家의 족보

해동정맥海東正脈 제1조祖
 태고보우太古普愚 화상 (4)
경허鏡虛 선사 출현, 

정체된 한국불교에 돌풍 몰고 왔다

금당(파평산 휴휴암주)

경허성우(鏡虛惺牛) 약전(略傳)

사(師)의 속성(俗姓)은 송씨(宋氏), 관향(貫鄕)은 여산(礪山)이다. 초명은 동욱(東旭), 법명(法名)은 성우(惺牛), 법호(法號)는 경허(鏡虛)이다. 철종(哲宗) 9년(1849) 8월 24일 아버지 두옥(斗玉)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전주(全州) 자동리(子東里)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9세 되던 해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왔다. 경기도 광주(廣州) 청계사(靑溪寺) 계허(桂虛) 스님에게 삭발득도하고 처음에는 물 긷고 나무하는 소임부터 성실하게 수업하다가 14세 때 한 선비가 절에 묵게 되어 그 선비로부터 귀동냥으로 눈치껏 글을 배웠는데 듣는대로 문리(文理)를 얻을 만큼 총명해서 나날이 학능은 진보하고 있었다. 은사인 계허 스님마저 환속하게 되었으므로 스님이 계속하여 배우지 못함을 애석하게 여겨 계허 스님은 계룡산(鷄龍山) 동학사(東鶴寺) 만화강백(萬化講伯)에 천거하였다. 만화강백의 처소(處所)에서 일대시교(一大時敎)를 수업(修業)하고 널리 내외전(內外典)을 섭렵하여 정통하지 않는 것이 없고 교계강단에 이름을 떨쳤다.
24세 때에는 대중(大衆)들의 요청으로 개강(開講)하니 사방의 학인(學人)들이 물이 동쪽에서 흐르듯 몰려들었다. 31세 때 여름, 전날 아껴주시던 계허 스님의 권속들이 생각이 나서 한번 찾아뵙고자 대중들에게 고하고 길을 떠나는데 도중에서 갑자기 폭풍우를 만나 어느 마을 추녀 밑에서 비를 피하려 하자 집주인이 스님을 내쫓는 것이 아닌가?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에 대하여 그 이유를 물으니 역병이 창궐하여 전염병에 걸리면 죽는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학인들을 피신시키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단정히 앉아 영운(靈雲) 선사의 “나귀는 일을 끝내지도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화두(話頭)를 참구하면서 다리를 자르고 머리를 쳐서 수마(睡魔)를 쫓으며 한 생각이 만년[一念萬年], 은산철벽(銀山鐵壁)과 같이 하였다. 이렇게 지내기를 석 달이 되어서 만기(萬機)가 벌써 익었다.

하루는 어떤 스님이 물었다.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백천법문(百千法門)과 무량(無量)한 묘한 뜻이 당장 얼음 녹듯 하였다.
그때가 기묘년(己卯年) 동짓날 보름께였다. 이때부터 육신이 초탈하여 일에 걸림이 없이 마음대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다.

32세 때 홍주(洪州) 천장사(天藏寺)에 머물면서 대중설법(大衆說法)을 할 때 전등연원(傳燈淵源)을 밝혔는데 사(師)의 법(法)은 용암(龍巖) 화상에게 있었으니 청허(淸虛)의 12세손이 되며 환성(喚惺)의 7세손이 된다. 그 뒤에 20여 년간 홍주 천장암과 서산(瑞山) 개심사(開心寺)와 부석사(浮石寺) 등지로 왕래하면서 때로는 마음을 고요히 하는 묵상(默想)을 하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떨쳤다.
51세 때 합천 해인사로 가니 때마침 칙명(勅命)으로 《대장경(大藏經)》 인출불사(印出佛事) 법주(法主)로 추대되었다.
54세 때 동래(東來) 범어사(梵魚寺), 금강암(金剛庵), 마하사(摩訶寺), 개분불사(改粉佛事) 증명사(證明師)로 추대되었다.
56세 때 오대산(五臺山)과 금강산(金剛山),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 개분불사 증명사로 추대된다.
64세 때 만행두타(萬行頭陀)로서 진흙에 들고 물에 들어가서 인연따라 교화한다.
임자년(壬子年) 4월 25일 갑산(甲山) 태이방(態耳坊)에서 병 없이 입적, 법랍 56세, 세수 64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경허집(鏡虛集)》의 간행유통

성우 스님의 문집(文集)은 처음 선학원(禪學院)에서 편집간행했고 불기(佛紀) 2969년 6월 《경허집(鏡虛集)》 간행발기인회(刊行發起人會)가 주관하고 통도사(通度寺) 극락선원(極樂禪院)이 간행한 보시유통본(布施流通本)이 있다. 《경허집》의 간행은 불기 2969년 6월에 한용운(韓龍雲) 화상을 위원장으로 하고 성월(惺月), 만공(滿空), 석상(石霜), 용운(龍雲), 도봉(道峰), 경산(擎山), 석우(石友), 구하(九河), 한암(漢巖), 운봉(雲峰), 청안(靑眼), 경봉(鏡峰), 효봉(曉峰), 적음(寂音), 운암(雲巖), 인벽(忍壁), 석주(昔珠), 상월(霜月), 상호(尙昊), 고봉(古峰), 운악(雲岳), 용음(龍吟), 서호(西湖), 동산(東山), 정광(淨光), 석하(石下), 원허(圓虛), 청봉(靑峰), 묵담(默潭), 인곡(仁谷), 춘성(春城), 석우(石牛), 철우(鐵牛), 대야(大冶), 태허(太虛), 원종(元宗), 보산(寶山), 석두(石頭), 대우(大愚), 동강(東疆) 등이 동참하고 안국동(安國洞) 선학원에 간행사무소를 개설하고 편집(編輯)에 등암(燈岩), 교준(校準), 대우(大愚), 서무(庶務), 응산(應山), 재무(財務), 영운(靈雲), 화주(化主), 경찬(景燦) 등이 업무를 분담하였다.
한용운 화상은 《경허선사문집》 발간취지문에서 경허성우 선사는 우리 조선 불교계에 있어 선종부흥과 현풍(玄風) 선양에 막대한 공로가 있을 뿐 아니라 종취(宗趣)가 심현(沈玄)하고 문채(文彩)가 명려(明麗)할 뿐 아니라 종횡농현(從橫弄現)하여 때로는 법문(法門)이 되고 혹은 시가(詩歌)도 되며 일생소작(一生所作)이 많으나 당시 이를 일일이 기록하는 자가 없었으므로 세상에 전래(傳來)된 것은 극히 적었다. 연대가 심원(深遠)하여지면서 점차 연몰(煙沒)될 우려가 아니되겠는가. 천하의 선지식(善知識)의 도담법어(道談法語)가 절실하게 요구될 뿐 아니라 조선수좌(朝鮮首座)로서 경허 선사의 설화는 요구치 아니할 것이나 선사의 공적에 대하여 기념비(記念碑)나 보은탑(報恩塔)을 조성하는 대신으로 그 유고(遺稿) 수집상재(蒐集上梓)하여 풍지제위에게 반포코자 한다고 전제하고 한 선원[一禪院]에 오원(五圓)개로 십전(十錢)의 동참금(同參金)을 모아 이 문집을 간행하였다.

경허성우(鏡虛惺牛) 선사 문집

1. 법어(法語), 진흙소의 울음[泥牛吼]
대저 참선(參禪)하는 이는 첫째로 무상(無常)함이 덧없이 빠르고, 나고 죽는 일이 큰 것임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이르기를 “오늘은 비록 보존하나 내일은 보존하기 어렵다” 하였으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게으름이 없는 다음에 온갖 세상에 조금도 간섭하는 뜻이 없이 고요하고 하염없이 지내야 한다. 다만 마음의 경계(境界)가 서로 흔들려서 마른 나무에 불붙듯이 번잡스럽게 정신없이 세월을 보낸다면 이것은 비단 화두(話頭) 드는 공부에만 방해가 될 뿐 아니라 나쁜 업보(業報)만 더할 뿐이다.
가장 요긴한 것은 일에 무심(無心)하고 마음에 일이 없게 하면 마음의 지혜가 자연히 깨끗해지고 맑아진다. 모든 일이 모두 마음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니 착한 일을 하면 천당에 태어나고, 악한 일을 하면 지옥이 나타나고, 포악하면 범과 이리가 되고, 어리석으면 지렁이와 곤충이 되며, 가볍고 분주하면 나비가 되나니, 그러므로 옛사람이 이르되 “한 생각의 차이가 그대로 만 가지 형상이 나타난다”하였으니 무릇 그 마음을 텅 비워서 성성(惺惺)하고 순일(純一)하게 하여 흔들리지도 않고 혼미하지도 않게 해서 허공(虛空)과 같이 훤칠하게 하면 어느 곳에 생사(生死)가 있으며, 어느 곳에 보리(普提)가 있으며, 어느 곳에 선악(善惡)이 있으며 어느 곳에 범할 게 있겠는가? 다만 활달하고 역력히 밝아서 마루에서 밑바닥까지 사무치면 삶을 따르지 않고, 멸해도 멸을 따르지 않고, 부처〔佛〕도 조사(祖師)도 짓지 않으며, 크게 대천세계(大千世界)를 감싸고 작게는 가는 티끌도 들어가며 능히 부처이며 능히 중생(衆生)이다. 또한 크고 작음도 아니요, 모나고 둥근 것도 아니요, 밝고 어두움도 아니어서 자유(自由)로이 융통(融通)함이 이렇게 철저하여 조금도 억지로 만들어내는 도리가 아니다. 무릇 이 현묘법문(玄妙法門)을 참구(參究)하는 이는 항상 반조하기에 힘쓰고 참구하는 용심(用心)이 성성하게 깨어있고, 세밀하여 끊어지는 사이도 없는 경지에 이르면 홀연(忽然)히 마음의 길이 끊어져 근본생명(根本生命) 자리에 이르게 되며, 본지풍광(本地風光)이 본래 스스로를 갖추어 원만한 경지에는 모자람도 남음도 없느니라. 귀에 부딪칠 때 바다의 풍랑소리가 수미산(須彌山)을 치는 것도 억지로 이렇게 함이 아니니라. 이날 도리는 너무도 가까이 있지만 다만 사람 스스로 체험해서 알려하지 않을 뿐이다. 무릇 현묘한 이치를 알리는 이는 마음자리를 돌이켜 비추는 공부를 착실히 알아야 분명하고 세밀히 해야지 아무렇게나 용심해서는 안 된다. 수행(修行)에 나서서 수행의 공력이 익어지면 실상(實相)의 이치(理致)가 스스로 나타난다. 태고(太古) 화상이 이르기를 “겨우 활을 들어 쏘자 화살이 돌에 박힌다”고 하였고, 청허 화상이 이르기를 “모기가 쇠소 등을 뚫는 것 같아서 부리를 댈 곳이 없다”하였으니 화두를 들고 참구하는 이는 마땅히 말로서 지남(指南)을 삼아야 한다. 만약 우리 일상생활의 온갖 행동을 논할 것 같으면 가슴속에 텅 비어 아무 것도 없으며 육근(六根)이 텅 비어서 이렇게 너그럽고 넓은 것이 보시(布施)이며, 이와 같이 맑고 깨끗한 것이 지계(持戒)이며, 이와 같이 항상 비고 부드러운 것이 인욕(忍辱)이며, 이와 같이 항상 끊임없이 나가는 것이 정진(精進)이며, 이와 같이 항상 고요하고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정(禪定)이니, 이와 같이 밝고 고요하여 명료하게 법을 간택하여 공(空)을 관(觀)함이 본래 어리석음이 없으며 모든 법의 모양을 분별함이 움직이지 않으며, 세상 인연을 따라주며 장애 없는 것이 지혜(智慧)이기 때문에 달마(達摩) 대사가 이르기를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 모든 행위를 포섭한다” 하였다. 뿌리를 잘 북돋아주는 데 힘쓸지언정 가지가 무성하지 않음은 근심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견성(見性)하여 부처가 될지언정 부처가 신통과 삼매(三昧)가 없음을 근심하지 말 것이요, 요즈음 사람들은 흔히 진정한 도인(道人)과 본색(本色) 납자(衲子)들이 참선을 하지 않으니 저 불자 가운데 법의 이치도 밝지 못하고 도의 안목(眼目)도 시원치 않으니 이는 갈림길에서 양을 잃은 것 같고 동산(洞山) 화상이 이른바 “가사(袈裟) 아래 사람의 몸을 잃은 것이 괴로운 것이다” 함이 이것이다. 길을 가는 이는 처음 바로 길을 들지 않으면 천리 길을 걸어도 헛걸음이라. 길을 떠나지 않은 것만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규봉(圭峰) 선사가 이르기를 “결택을 분명히 한 뒤에 깨닫는 이치를 닦아나가야 한다” 하였다. 대개 초가삼간의 집을 지으려 하더라도 먹줄을 치고 자귀로 깎아 내는 공력이 없으면 성취할수 없는데 하물며 원각대가람(圓覺大伽藍)을 조성하는데 이치대로 하지 않으면 어떻게 성공하겠는가. 작은 일을 하는 데도 모르면 누구에게라도 물어라. 그 사람이 분명치 않으면 다시 지혜(智慧)가 있는 사람에게 물어서 기어이 차질이 없이 성공하는 것이 조예가 아니겠는가. 깊고 오묘한 도에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은 거개가 경솔함으로 소홀하지만 자세히 결택(決擇)하여야 한다. 슬프다. 어찌 경계하지 않으리요. 무상함을 경계해서 큰일을 깨달아 밝히고자 하는 이는 바로 스승을 찾아라.

13세 동자 경석군에 보이다〔示慶奭君十三歲童子〕

이 일원상(一圓相)은 성현과 더불어 범부(凡夫)와 한 몸이요, 다른 것은 없다. 저 육처(六處)에 치달아 부침하여 그 맑은 광명(光明)의 둥근 이치가 미(迷)한 이는 범부요, 능히 정신을 모아서 오로지 순일하여 치닫지 않은 이가 성인(聖人)이로다.
이 둥근 이치는 만물의 조화기관이니 돌이켜 비추어서 비추는 공(空)이 극도(極度)에 도달하면 성현의 깊은 문을 불쑥 들어갈 수 있도다. 그 마음을 밝게 하고, 그 마음을 고요히 함이 제일 묘한 방법이니 어느 곳, 어느 때나 참구하되 능히 시종여일(始終如一)하면 자연히 성공하리라.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의 관문(關門)을 뚫어야 하나니 오묘한 깨달음은 마음길이 끊어져 다함이 요구한다. 총평으로 능히 업력을 대적치 못하며 옅은 지혜로 어찌 능히 생사를 면하겠는가? 그러므로 생사윤회를 면하고자 하면 오로지 선정의 힘을 익혀야 한다. 평소에 굳게 재물과 여색 따름은 선정력을 얻지 못해서이며 임종(臨終)할 때 심성(心性)의 혼미함도 이로 말미암아서이다.

心月孤圓 마음의 달 홀로 둥글고
光呑萬像 빛은 만상을 삼키는데
光境俱忘 빛도 경계도 함께 사라지는구나
復是何物 또다시 이것이 무엇인고.

一圓相

이 게송은 함경도 산수갑산(山水甲山)에서 임종게라고 수습했는데 《벽암록(碧巖錄)》 본칙 3칙 반산보적(盤山寶積) 스님의 시중법문이다.

만공(滿空) 법자에게 주다

수산월면(  山月面)에게 글자 없는 도장을 부쳐주고 주장자를 잡아 한 번 치고 이르기를 “다만 말소리가 이것이라고 하였으니 또 말해봐라. 무슨 도리인가.” 또 한 번 치고 이르기를 “한 번은 웃고는 알지 못할 것이다. 낙처가 어디인가. 안면도의 봄물이 푸르기가 쪽빛 같도다” 하고 주장자를 던지고 호음하고 내려오다.
[付了無文印爲  山月面拈柱杖卓一下云  這語聞是旦道甚 z道理又卓一下云笑不知何處去眼眠春水碧藍擲却了톳]

법자(法子) 혜월(慧月)에게 주다

了知一切法 알거라 모든 법이여
自性無所有 자성에는 소유가 없도다
如是解法性 이와 같이 법의 성품을 알려면
卽見盧舍那 곧 로나사 부처를 보아라.

세간(世間)의 형식은 놔두고 글자 없는 도장을 거꾸로 제창(提唱)하노니 산다리한 관문(關門)으로 서로 싸 바르노라.
경인년(庚寅年) 늦은 봄날 경허가 혜월에게 주다

한암(漢岩)에게 준 전별사(餞別辭)

나는 천성이 인간세상에 섞이어 살기를 좋아하고 겸하여 진흙 가운데에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다만 스스로 절룩거리며 44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우연히 해인정사(海印精舍)에서 원개사(遠開士)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성행(性行)은 순직(純直)하고 학문이 고명(高明)하였으며 함께 추운 겨울을 서로 세상 만난듯 지냈는데 오늘 서로 이별하게 되었으니 아침저녁 연기구름과 멀고 가까운 산과 바다가 실로 보내는 회포를 뒤흔들지 않을리 없다. 하물려 덧없는 늙기 쉽고 좋은 인연 다시 만나기 어려운즉 이별의 쓸쓸한 마음이야 어떻다고 말할 수 있으랴. 옛사람이 말하기를 새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진실로 마음을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랴 하지 않았던가. 슬프도다 은밀스런 원개사(遠開士)가 아니면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랴. 그래서 한 수 시(詩)를 적어 뒷날에 잊지 말자고 부탁을 하노라.

霜菊雪梅  過了 서리국화 설중매는 겨우 졌는데
如何承侍不多時 어찌하여 오래토록 모실 수 없을까요
萬古光明心月在 만고 빛나는 달이 있는데
更何浮世  留期 뜬세상 뒷날 기약 부질없습니다.

만공월면(滿空月面) 선사

만공(滿空)의 속성은 송씨(宋氏), 휘(諱)는 월면(月面), 법호는 만공이니 고종(高宗) 12년(1875) 3월 7일 전북 정읍군 태인면(泰仁面)에서 출생했다. 15세에 서산(瑞山) 천장사(天藏寺)로 출가하여 태허(泰虛) 화상에게 삭발하고 활구선(活句禪)을 참구하다가 1895년 7월 25일 새벽 종송(鍾頌)의 ‘응관법계성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一切唯心造)’란 구절을 듣고 활연히 대오(大悟)하고 오도송(悟道頌)을 읊었다.

空山理氣古今外 공산이기는 고금 밖이요
白雲淸風自去來 백운청풍은 스스로 가고 온다
何事達摩越西天 무슨 일로 달마서천을 넘고
鷄嗚丑時寅日出  축시에 닭 울고 인시에 해가 뜬다.

경허의 법을 이어받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덕숭산(德崇山) 정혜사(定慧寺),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선풍(禪風)을 떨쳤다. 스님의 정치적 수완과 늠름한 위풍은 사명(四溟)을 연상하리만큼 당당하였다. 1911년 3월 11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제1회의실에서는 식민지정책(植民地政策) 방편으로 조선사찰령(朝鮮寺刹令)을 공포하고 서울에 박문사(博文寺)를 지어 31총본산을 만들어 31총본산의 주지총회를 열고 서명날인하려 일본역대총독의 은공(恩功)을 물으니 타 주지들은 하나같이 조선불교의 번창과 대법흥융(大法興隆)의 교화들 폈다고 일구난설(一口難說)로 칭찬을 늘어놓는데 당시 마곡사(麻谷寺) 주지인 만공 스님은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을 질타하면서 경전에 한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를 파계(破戒)시키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져 일일일야(一日一夜)에 만생만사(萬生萬死)의 고를 받는다고 하였거늘 역대 총독이 무수한 비구를 파계시켜놓았으니 어찌 죄가 없으랴. 이런 일이 있은 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기 위한 박문사(博文寺) 31본산제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스님은 1946년 4월 20일 세수(歲壽) 76세, 법랍 64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법계(法系)에 성봉(性峰), 청송(靑松), 담연(湛然), 수옹(修), 수공(修空), 보월(寶月), 법해(法海), 혜암(慧庵), 서경(西耕), 석암(石庵), 지암(芝岩), 구성(龜性), 고봉(古峰), 춘성(春城), 혜산(慧山), 초우(草牛), 성경(性鏡), 취산(翠山), 학송(鶴松), 완산(玩山), 백우(白牛), 영봉(映峯), 효산(曉山), 혜우(慧牛), 영하(榮夏), 종면(鍾冕), 진정(眞正), 만허(滿虛), 서해(瑞海), 서호(西湖), 연등(燃燈), 적음(寂音), 덕산(德山), 금봉(錦峰), 포산(飽山), 벽정(碧定), 수관(水觀), 혜경(慧鏡), 정관(正觀), 능유(能幽), 석영(夕影), 영천(靈泉), 중운(重雲), 석우(石牛), 현호(玄湖), 지체(眞諦), 청운(靑雲), 향암(香岩), 정영(靜影).

혜월혜명(慧月慧明) 선사

속성은 신씨(申氏), 휘는 혜명(慧明), 법호는 혜월(慧月)이다. 철종(哲宗) 12년(1861) 충남 예산(禮山)에서 출생했다. 11세에 덕숭산 정혜사 안수좌(安首座)에게 삭발하고 24세 경허 선사에게 보조(普照) 국사의 《수심결(修心訣)》을 수학하여 심의(深義)를 깨닫고 41세 때 경허 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48세부터 도이사(桃李寺), 파계사(把溪寺) 성전(聖殿), 울산 미타암(彌陀庵), 통도사(通度寺) 극락암(極樂庵), 천성산(千聖山) 내원사(內院寺) 등을 다니며 종풍(宗風)을 대천(大闡)하였으며 61세 때(1922) 부산 부암동 선암사(仙岩寺) 주지로 있으면서 자수(自手)로 산지(山地) 2,000여 평을 개간하여 훌륭한 논을 개답(開沓)하였으므로 당시 세간에서는 만공의 건축, 혜월의 개간, 용성(龍城)의 역경(譯經)이라고 일컬었다. 만공은 덕숭산에 많은 사암(寺庵)을 건축하였고 용성은 서울 봉익동 대각사(大覺寺)에서 많은 경전을 번역하였으므로 경전 번역의 비조(鼻祖)가 되고 혜월은 가는 곳마다 개간을 게을리 하지 않아 제자들이 개간하는 비용을 충당하였다. 이들 3인의 보시행은 근래에 희유한 선지식(善知識)이었다. 1937년 세수 77세, 법랍 66세를 입적했다.
법계에는 풍암(楓岩), 운암(雲巖), 현봉(鉉峰), 금우(金牛), 운봉(雲峰), 보해(寶海), 운경(雲耕), 운허(雲虛), 철우(鐵牛), 혜원(慧苑), 탄월(呑月), 도암(道庵), 석호(昔湖), 추산(秋山), 만화(萬化), 성규(聖奎), 서문(西文), 종제(鍾濟).

한암중원(漢岩重遠) 선사

1876년 3월 27일 강원도 화천(華川) 출생으로 아버지는 기순(箕淳), 어머니는 선산(善山) 길씨(吉氏)이고, 본관(本貫)은 온양(溫陽)이다. 속명(俗名)은 중원(重遠), 법호는 한암(漢岩)이다.
9세 때(1885) 《사략(史略)》을 읽다가 “반고씨(盤古氏) 이전에는 누가 있었는가”의 의단독로(疑團獨露)하였다. 21세 되던 해(1897)에 금강산 장안사에서 득도하였다. 은사는 행름(行凜) 화상이다. 신계사 보운강회(普雲講會)에서 간경(看經)하였다. 어느 날 우연히 보조(普照)의 《수심결(修心訣)》을 읽다가 제1차 깨달음을 얻었다.
23세 때(1899)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 선사를 만나서 《금강경(金剛經)》의 한 구절을 듣고 제2차의 깨달음을 얻었다. 경허로부터 “개심(開心)을 넘었다”고 인가(印可)를 받는다. 1903년 해인사 선원에서 《전등록(傳燈錄)》을 읽다가 다시 미로(迷路)를 방황(彷徨)하게 된다. 1905년 통도사 내원선원(內院禪院)의 조실(祖室)로 추대된다. 1910년 내원선원의 선승들을 해산하여 평북 맹산군 해전면 풍림리 우두암(牛頭庵)에서 보임(保任)하다 문득 제3차의 구경각(究竟覺)을 얻었다.
25세 되던 1925년 서울 봉은사(奉恩寺)의 조실로 추대된다. 곧 오대산에 들어가 입적할 때까지 27년간 불출동구(不出洞口)하였다. 1928년 경봉 선사와 서간문답(書簡問答)을 시작하여 총 24편의 서간을 경봉에게 보낸다. 53세(1929)에 조선불교승려대회에 의해서 원로(元老)기관인 7인교정(敎正)에 추대된다.
1930년 《불교》 제70호에 〈해동초조(海東初祖)에 대하야〉를 발표하였으며 1931년 경허 선사의 행장(行狀)인 〈선사경허화상행장(先師鏡虛和尙行狀)〉을 찬( I)하고 《선원(禪苑)》 창간호에 〈일진화(一塵話)〉를 발표하였다. 1932년 《불교》 제95호(5월)에 〈경허화상행장〉의 번역이 게재되고 《불교》 제100호(10월)에 〈참선에 대하야〉와 《선원》 제2호에 〈악기식(惡氣息)〉을 발표하였으며 《금강저(金剛杵)》에 〈송금강저(頌金剛杵)〉를 게재했다. 1933년 《선원》 제3호에 〈양어가추(揚於家醜)〉를 발표하였고 1935년 《선원》 제4호에 〈연년갱유신조재(年年更有新條在) 뇌란춘풍졸미휴(惱亂春風卒未休)〉를 발표하였다.
60세(1936)에 조계종을 결성하고 초대종정(初代宗正)에 추대되어 8.15 광복 때까지 재직하였다. 1937년 《보조법어(普照法語)》의 편집, 현토, 간행을 하였고 그 서(序)인 〈고려국보조선사어록찬집중간서(高麗國普照禪師語錄纂集重刊序)〉를 집필하였다.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실제로는 六祖, 治父, 宗鏡의 三家解와 涵虛說誼)의 편집, 현토, 간행을 했고 그 서인 〈금강반야바라밀경중간연기서(金剛般若波羅密經重刊緣起序)〉를 집필했다. 《금강저》 제22호에 〈묘포서(猫捕鼠)〉를 발표하였다. 선학원에서 열린 고승 법회에 초청받았으나 불출동구의 원(願)에 따라 사양하고 불참하였다.
1943년 《금강저》 제26호에 〈원단착어(元旦着語)〉를 집필하였다. 1947년 상원사(上院寺)의 화재로 문집 〈일발록(一鉢錄)〉이 소실된다. 74세(1950) 때 6.25 전쟁의 와중에서 상원사의 소각을 저지한다.
1951년 3월 22일 선상(禪床) 위에 앉아 좌탈입망(坐脫入亡)하여 용무생사(用無生死)의 경지를 나타냈다. 세수 75세, 법랍 54세. 1951년 5월 8일 49재를 맞아 부산시 토성동 묘심사(妙心寺)에서 고교정방한암대종사봉도법회(故敎正方漢岩大宗師奉悼法會)를 거행하였다.
1959년 탄허(呑虛) 등 문도들이 부도(浮屠)와 비를 상원사에 세웠다.
법계에는 보문(普門), 수암(  庵), 묵암(默庵), 담허(湛虛), 탄허(呑虛), 자암(慈庵), 동산(東山), 중봉(中峰), 학조(學祖), 철화(徹華), 환운(還雲), 은봉(銀峰), 등운(藤雲), 해경(海耕), 애암(曖庵), 동은(東隱), 영성(影聲), 현칙(玄則), 양전(良田), 보산(寶山), 호산(湖山), 윤교(倫敎), 사홍(思弘), 대형(大衡), 재성(在星), 영균(榮均), 택천(擇天), 석규(昔規), 척순(  詢), 계형(戒亨), 수용(壽用), 해련(海蓮), 중백(中伯).

용성진종(龍城震鍾) 선사

용성(龍城), 수월(水月)은 경허의 문하는 아니나 구한말기(舊韓末期)의 선법중흥(禪法中興)의 일원으로 맹열히 선법을 전개하여 정체된 조선불교의 돌풍이었던 경허 선사의 출현만큼 지대한 적공이 현저하였다. 용성 스님의 속성은 백씨(白氏), 휘는 진종(震鍾), 법호는 용성(龍城)이다. 아버지 남현(南賢), 어머니 밀양 송씨 사이에 남원군 하번암면 죽림리에서 고종 원년(1964) 5월 18일에 태어났다. 6살 때 어버지가 잡아온 물고기를 방생하였으며 17세에는 합천 해인사 극락전에 화월(華月) 화상을 은사로 하고 상허혜조(相虛慧造) 율사를 계사로 하여 득도했다. 수개월 후 의성(義城) 고운사(孤雲寺)에서 수월 장로를 참방(參訪)하고 서래종지(西來宗旨)를 물으니 수월이 지시하되 “거성시(去聖時)에는 마강법약(魔强法弱)하며 숙업장중(宿業障重)하여 선약난배(善弱難排)하니 성예삼보(誠禮三寶)하여 근송대비주(勤誦大悲呪)하면 자연업장이 소멸되고 심광투루(心光透漏)하리라” 하였다.
 21세 때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선곡(禪谷) 율사에게 비구계(比丘戒)와 보살계(菩薩戒)를 받았으니 칠불암(七佛庵) 대은(大隱) 율사의 정맥(正脈)이다. 송광사(松廣寺) 감로암(甘露庵)에서 호붕강백(湖鵬講伯) 회하에서 기신론(起信論)과 법화(法華)를 곡성 태안사(泰安寺) 수경강백(水鯨講伯)에게 《선요(禪要)》, 《서장(書狀)》을, 지리산 상무주(上無住) 석교(石橋) 율사에게 《범망경(梵網經)》, 사분율(四分律)을, 해인사 월화강백(月華講伯)에게 선문염송(禪門拈頌)을, 대승사(大乘寺) 월화강백에게 화업십지(華嚴十地) 및 치문(緇門)을, 환성(喚醒)의 원사(遠嗣)하였으며 국가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을미(乙未, 1919)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체형 6개월의 복역을 치루었다.
선농병행(禪農竝行)을 주창하고 함양(咸陽) 백운산(白雲山)에 화과원(華果院)과 북간도에 농장을 만들었으며 참선만일결사(參禪萬日結社)를 하동 칠불암부터 발족하여 도봉산 망월사, 천성산 내원사 등의 납자들을 제접하였다. 서울 봉익동 대각사에서 화엄, 원각, 금강 등의 역경에 크게 힘썼으며 1940년 세수 77세, 법랍 59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선문화》2008년 9월호 참조

기사 작성일 : 2008-09-24 오후 2: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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