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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인탐구 ②|김지장

 

김지장의 茶의 뿌리

신라인가 중국인가

 

최석환(본지 발행인)

김지장이 차씨를 심은 구화산.

김지장(金地藏, 696~794)이 구화산에 심었다는 김지장차는 신라에서 휴대하여 가져갔을까? 그도 아니면 안후이성(安徽省) 인근의 차씨였을까? 최근 들어 뜨거운 논쟁이 중국 차학계로부터 불어오고 있다. 중국 차학계는 김지장이 신라에서 갈 때 차씨를 휴대하지 않고 안후이성 인근에서 가져갔다는 설을 속속 발표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놓고 국내 차학계는 정보가 전무한데다가 어떤 흐름으로 김지장의 차사가 변화되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중국 차학계 사정과 국내 사정에 정통한 필자가 진화에 나서게 되었다. 우리 차학계는 근래 중국에서 일어나는 차 연구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는 반증이다. 그러한 까닭에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이 생각난다. 자기 발밑을 살피라는 말이 차계를 두고 하는 말인 듯 다가왔다. 필자는 1993년 우리나라 첫 학술서 《육신보살지장법사》 출간 이후 덮어두었던 김지장차의 실체를 규명키 위해 다시 붓을 잡고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다.

노호동에서 찾은 김지장 차수

지장 법사가 당 지덕 2년(757) 숙종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금인. 무게는 7근 반(4.5kg)이며 9마리의 용과 ``지장이성금인(地藏利成金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1999년 10월 필자는 김지장이 수행했던 구화산 노호동 정상 바위 암벽 사이에서 수령(樹齡) 500년 정도로 추정되는 김지장 차수를 발견하고 가슴이 뛰었다. 발견 경위는 이렇다. 당시 구화산 일대에서 김지장의 자취를 찾던 중 노호동 정상 바위 암벽 사이로 나뭇잎 하나가 햇빛에 반사되면서 눈부시게 빛났다. 그 순간을 놓칠 리 없는 필자가 단숨에 암벽을 타고 바위 위로 올라갔다. 사람 키만한 나무 세 그루가 햇빛에 반짝거리며 서 있었다. 바위를 건너뛰어 가까이 다가가 나무를 살피니 차나무였다. 그 자리에서 실측한 뒤 사진을 찍고 1999년 12월 <불교춘추>(통권 16호)를 통해 공개하자 세상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지금까지 한국 차나무 전래설을 놓고 의견이 분분할 뿐 아니라 대렴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가져온 차씨를 지리산에 심은 것이 한국차의 전래설로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대렴보다 80년 앞서 신라 땅에 차나무가 있었다는 것은 한국차사를 뒤집을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구화산 노호동에서 새로 발견한 김지장 차수가 이를 뒷받침해 준다.
2002년 열반한 당시 구화산 방장 인덕 스님을 만났을 때 노호동 차나무 발견 사실을 말씀드리자 깜짝 놀라며 신라차가 중국에 전래하였다는 설을 입증하는 결정적 사건이라고 기뻐했다. 그 뒤 차나무를 확인하기 위해 국내외 많은 전문가들이 노호동 차나무를 찾으려 했으나 보존 차원에서 그 차나무를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하여 오늘까지 숨겨져 있다.
지금까지 《구화산록》에 남아 있는 김지장 차나무는 김지장 스님이 남대에 살았을 때 심었다는 남대공심차로 알려져 있었다. 그곳은 오늘날 소천태(小天台)의 남대암(南台庵)이라 부른다. 안후이농업대학의 왕젠흥(王鎭恒)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지금도 약 10그루의 차나무가 있는데, 높이가 약 160cm에 나무 폭이 130cm이며 잎의 길이는 11.5cm라고 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김지장의 차나무 중 최고의 기록이었다.
이 차나무는 지장 스님이 고배경대(高拜經台)에서 은거하고, 천태동굴에서 수행하면서 차를 달여 먹었다는 설득력 있는 장소에 자생하고 있어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차나무로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이번에 노호동에서 발견된 김지장차는 김지장 스님이 제일 처음 구화산에 은거하면서 수행했던 동굴 정상에 남아 있어 설득력이 강하다. 차나무는 높이가 230cm나 되고 차나무의 둥치가 사람 팔뚝보다 굵다.
김지장차 연구가 세상으로 퍼져 나가자 중국 차학자 그룹이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 전말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김지장차 원산지 신라 설에 대한 논쟁

당 태화 2년(828) 대렴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가 귀국할 때 차씨를 휴대하고 돌아와 지리산에 심은 뒤 신라에 차가 전파되었다는 설은 익히 알려졌다. 그 학설을 주장하면서 김지장이 신라에서 가져간 차씨는 수용하지 않는 중국 차학 그룹은 누구인가.
그 도화선은 2009년 5월 재연되었다. 닝보 국제 해상차로 연토회에서 2008년 필자는 <중국 차문화를 한국에 전파해 간 주요 인물과 그의 사상>이란 논고를 발표해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 논고를 같은 해 <건축과 문화>(2008년 5월)에 <중국차를 한국에 전파한 인물>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바 있다. 그 내용 중 김지장 부분을 살펴보자.

한·중 차문화 교류사를 살필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人物)이 김지장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신라 왕손으로 태어나 24살 때 중국 안후이성 구화산으로 들어가 열반(涅槃)한 뒤 지장 보살(地藏菩薩)의 화신이 되었다. 그가 신라에서 중국으로 갈 때 휴대(携帶)하고 간 차(茶)가 김지장차였다. 이는 대렴이 중국으로부터 차씨를 가져온 시기보다 80년이 앞선다. 《구화산지(九華山志)》 권8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온다.
"김지장차는 신라 때(당영휘(唐永徽) 14년, 서기 653) 지장 스님이 신라에서 가져간 차종의 이름이다.", "나무줄기가 속이 비어 작은 대나무와 같다[梗空如○] 전하는데 김지장이 (신라로부터) 가져온 차씨였다고 한다[相傳金地藏携來種]."

《청양현지》에도 "김지장차란 서역으로부터 가져온 것이다"라고 전해지며 1669년 유원장(劉源長)이 지은 《개옹다사(介翁茶史)》에는 더욱 구체적인 글이 보인다. <공경차(空梗茶)>가 그것이다.

구화산에는 공경차가 있는데 이는 김지장이 심은 바이다. 대체로 보건대 구름 안개 중에 기후가 항상 온습하여 이 땅에 심은바 맛이 자연 것과 같지 않았다. 구화산은 지주 청양현으로 원명은 구자산이다. 이태백이 아홉 봉우리가 연꽃을 닮았다고 하여 고쳐 구화산으로 하였다. 김지장은 신라 스님으로 당나라 지덕 연간(756~758) 바다를 건너 구화산에 거처하며 이 차를 심었다. 나이 99세에 함중에 앉아 임종하였는데 3년 뒤에 함을 열어 보니 얼굴빛이 살아 있는 듯했으며 뼈마디가 모두 움직이더라[九華山有空梗茶 是金地藏所植 大低煙霞雲霧中氣常溫潤 與地植味自不同 山屬池州靑陽原名九子山 因李白謂九峯似蓮花乃更爲九華山 金地藏新羅國僧 唐至德間渡海居九華乃植此茶 年九十九坐化函中 後三載開視顔色如生與之骨節俱勤].

그 차가 중국 안후이성 구화산의 구화불차(九華佛茶)로 알려진 바로 그 차였다.
《전당시(全唐詩)》 권808에 김지장의 차시(茶詩)가 전해 오는데 <송동자하산(宋童子下山)>이 바로 그 시로 동국인(東國人)이 지은 것 중 현존하는 최초(最初)의 율시(律詩)이다.

空門寂寞汝思家 절간이 적막하니 집 생각 나겠지
禮別雲房下九華 승방에서 작별하고 너는 산을 내려간다
愛向竹欄騎竹馬 대나무 울타리 옆에서 죽마 타던 것 그리워
懶於金地聚金沙 절에서의 수양을 게을리 하더니
漆甁澗底休招月 산골 물 병에 담아 달 부르기도 그치고
烹茗遼中罷弄花 사발에 차 달이며 꽃 장난도 그만두고
好玄不須頻下淚 잘 가거라 눈물일랑 자주 흘리지 말고
老僧相伴有煙霞 노승에겐 벗할 안개 노을 있으니.

김지장의 이 시가 구화산 차문화에 끼친 공적(功績)을 놓고 볼 때 한국차를 중국에 전파(傳播)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정중종(淨衆宗)을 일으킨 무상 선사가 선차지법(禪茶之法)을 일으킨 비조(鼻祖)로 떠오르면서 오히려 중국 차문화사에 동국인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논문이 나간 뒤 닝보 차문화 촉진회 비서장인 주지파(竺濟法)는 <차주간(茶周刊)>(2008년 9월 16일)에 실린 <김지장의 차와 구화산>이란 글에서 문제를 들고 나왔다.
먼저 그는 《구화산지》와 《청양현지》의 기록을 들어 "일반적으로 ``전하다[傳]``라는 것은 전설이나 입으로 전해진 것으로 확실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다행히 김지장은 아래에 인용된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의 시에 샘물을 길어 차를 끓인 아호(雅好)가 쓰여 있다. 그가 차를 좋아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완전히 그가 구화산에 차를 심었던 사실성에 대한 증거일 수 있다. 또한 ``휴대해서 왔다``는 표현이 부정확하다. 필자는 인터넷의 많은 글에서 그가 신라에서 휴대해 왔다는 글을 보았다. 2008년 4월 하순 닝보(寧波)에서 열린 동아시아차문화연구센터 시상식 겸 해상차로국제논단(海上茶路國際論壇)에 참가한 최석환 선생도 논문에서 김지장이 신라차를 가지고 구화산에 왔다고 말했다"라고 서술했다.
그러나 주지파는 김지장이 신라에서 차씨를 휴대하고 구화산으로 왔다는 근거는 인증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 이유는 한국에는 원래 차가 자라지 않은 데다가 대략 6~7세기에 중국에서 전해졌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김지장이 구화산에 심은 것이 신라차라면 먼저 한국에서 원래 차가 자랐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증거가 없다면 그가 신라에서 차를 가지고 왔다고 말하기 어렵다. 혹은 그가 가지고 온 것이 중국에 전해진 차라면 이것은 논리적으로 매우 성립하기 어렵다는 견해였다.
이에 2009년 5월 제2차 해상차로 연토회에서 안후이농대 딩이쇼우(丁以秀) 교수가 <김교각과 구화산>이란 논문을 들고 나와 주지파의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다. 즉 "김교각(金喬覺)은 개원(開元) 7년(719)의 당나라 흥성 시기에 중국에 왔는데 당시 신라에는 차나무가 없었다. 그래서 모두가 신라에도 좋고 서역에도 좋은 후인의 신화라는 것은 근거가 되기엔 부족하다. 만약 구화차를 김교각이 가지고 왔다면 그것도 구화산 부근 지역에서 가져온 중국 차씨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구화산지》나 관련 자료들을 검토해 보면 김지장이 신라를 떠나 구법 길에 오를 때 차씨를 휴대하고 구화산에 심은 것이 분명해진다. 딩이쇼우의 스승이며 안후이농대 교수를 지낸 《중국 명산지》의 저자 왕젠흥  교수는 <구화산 김지장과 차문화>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청양현지》에서 김지장차란 서역으로부터 가져온 차이다. 차의 전파 경로와 유래를 살펴보면 김지장이 바다 동쪽 신라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고대에 농업이 발달한 국가로서 여러 가지 농업기술이 발달하였다. 기원전 후 삼한은 이미 벼 재배를 하였고 8백 년 후 김교각이 누런 벼와 오차송과 차씨를 가지고 구화산에 왔다. 그때 말하기를 서역은 동쪽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신라를 가리킨다"고 분명히 밝혔다.
뒤늦게 중국 전문가와 학자들이 구화산 차 전래를 놓고 대렴의 차씨 전래설과 당시 신라에는 차가 없었다는 근거를 들어 김지장차의 구화산 전래설을 부정해 버렸다. 그러나 80년 초 발표된 왕진항의 글도 분명히 서역은 신라를 가리킨다고 못 박았다. 더욱이 중국 차 연구가인 린시민(林士民)은 2009년 닝보에서 열린 해상차로와 동아시아 차문화 연토회에서 발표한 <조선 반도로 전해진 해상차로>에서 필자의 졸고 <중국 차문화의 한국전파>라는 글을 인용, 장보고 선단을 통해 차씨가 전해졌다고 피력했다.
이렇듯 중국 땅에는 차학계 그룹을 중심으로 김지장이 구화산에 심은 차씨가 신라에서 가져온 것인가, 그도 아니면 구화산 자생인가를 놓고 뜨거운 논쟁을 벌이고 있는데 지금 한국 차학계는 이 같은 논의 자체도 모르고 있으니 얼마나 국제 차학계의 동향에 뒤떨어져 있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나마 필자가 중국 유수의 학술 연토회에서 논문들을 발표해 중국 차학계를 깨우면서 지금까지의 연구를 뒤집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2008년 4월 필자가 닝보에서 열린 해상차로 국제 논단에서 <김지장과 김지장차>를 발표하면서 불씨가 타올랐다. 그 뒤 구화산의 김지장차 전래설에 관한 논의가 뜨겁게 타올랐다.

김지장은 누구인가

김지장차 군락을 이룬 쌍계사 주변의 차나무들과 김지장이 처음 은거한 노호동 정상에 있는 김지장차. 이 차나무의 발견으로 김지장차가 신라에서 건너갔음을 입증했다(위부터).

김지장의 속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교각(喬覺)이며 신라 35대 경문왕 김헌영(金憲英)의 가까운 친족 또는 신라 왕족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고승전》 18권에는 ``지장의 속성은 김씨이며, 신라국 왕가의 지속이다[新羅國王之屬也]. 마음은 자비로우나 얼굴이 무섭게 생겼고 영오(穎悟)가 천연스럽다고 기록되어 있다[慈心而貌惡穎悟天然]. 키는 칠척 거구였으며 머리에 특이할 정도로 뼈가 높이 솟았고 힘이 장사였으며[七尺成軀頂從○特高], 항상 스스로 말씀하시길 시방세계 넓은 우주 안에 불성이 충만하여 조금도 빈 곳이 없다고 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김지장(교각)은 중국 동청(東靑) 양현(陽縣) 청양 고을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안후이성에 위치한 구화산은 처음에는 구자산(九子山) 또는 능양산(楞陽山)이라 하였는데 중국 안후이 남쪽 청양현에 있는 산이다. 안후이성은 북으로는 양쯔강을 굽어보고 남으로는 명산 황산(黃山, 1,873m)과 마주한 곳이다. 이 산은 십왕봉(十王峰, 1,342m)을 중심으로 사방에 99개의 봉우리가 솟아 마치 바위의 기이함이 아홉 용이 하늘에 오르다 문득 벼락을 만나 돌로 화한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구화산은 원래 구자산인데 당나라 시인 이백(李白)이 구봉(九峰)의 아름다움에 도취해 구봉을 아홉 개의 연화에 비유한 이래 구화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신라 청년 김지장 스님이 입산하기 전의 구자산은 민간 산악신앙지였다. 갈홍(葛洪, 343~383)은 일찍이 이 산에서 도교를 널리 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교와 민간신앙지인 이곳에 불교를 최초로 전파한 스님은 동진(東晋)의 배도(杯渡) 화상으로 서기 401년에 화성사 쪽에 초막을 짓고 포교를 시작했다. 그 후 당나라 중기 단호(檀號)라는 승려가 머물면서 불법을 펼쳤으나 도교와 불교가 서로 대립하며 본격적인 신앙의 중심지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
신라 청년 김지장 사문이 구화산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719년 그의 나이 24살 때이다. 구름에 가린 구화산 봉우리를 보자 천리길을 덤불과 칡넝쿨을 헤치며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구자산에 이르렀다. 여기서 수행 정진하여 불도 닦기를 마음먹고 신라에서 데리고 온 흰 개와 함께 수행할 곳을 찾다가 화성사 동쪽 골짜기 절벽 위에 바위가 있는 동굴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겨우 한 사람 정도 들어가서 수행할 만한 동굴이었지만 구름이 뭉게뭉게 뜨는 광경과 구화산 99개 봉우리가 한눈에 보이는 수행하기 좋은 곳이었다. 동암이라는 석굴인데 지장은 자연과 구름과 벗하며 구화산 깊은 산중에서 고행의 나날을 보냈다. 지장은 동암동에서 신라에서 데리고 온 신견과 더불어 규칙적인 승려 생활을 하루하루 해 나갔다.
《송고승전》에 지덕(至德) 연간의 처음에 제갈절(諸葛節)이라는 이가 그 촌의 노인들을 데리고 산기슭으로부터 높은 데까지 올라가 보니 산이 워낙 깊고 험하여 사는 사람이 없고 오직 지장 한사람이 초연하게 돌집에서 눈을 감고 앉아 참선하고 있으며 그의 방에는 다른 살림살이가 없고 다리 부러진 솥만이 있는데 흰 흙에 약간의 쌀을 섞어 삶아 먹으며 살고 있었다. 이를 본 그 촌의 늙은이들이 놀라고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스님이 이렇게 고행(苦行)으로 도를 닦고 있는데 우리는 산 밑에서 편히 살고 있으니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하고 서로 힘을 모아서 지장 스님이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절을 하나 지어 주기로 하였다. 1년이 채 못되어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법당이 건립되자 대중이 늘어나게 되었다. 지장 스님의 제장인 승유(勝瑜)는 대중과 함께 황무지를 개간하고 밭을 일구어 파종을 했다. 신라에서 가져간 김지장차도 개간한 밭에 심었다.

空山無人雲日○靡 빈산에 사람 없고 구름 덮인 햇살 희미하여라
付老相尋探幽疾止 마을 늙은이를 찾아와 내려가지 않고 절을 지어
乃構禪宇龍○寶梁 기둥과 들보 아름다워라
勝境巍巍普枚大光 높고 높은 좋은 경치 큰 광명 놓을세라.

이렇듯 김지장의 농선병행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 차 연구가인 최정간 씨는 송나라 명재상 장상영에 의해 저술된 《호법론》을 찾아내 김지장 보살이 백장회해보다 먼저 농선병행을 했다고 밝혔다. 이로 보아 김지장은 중국에서 차와 농선을 병행, 중국 차문화사에 획을 그었던 인물임이 틀림없다.

 

<차의 세계> 2010년 11월호 참고

 

기사 작성일 : 2010-11-09 오후 3: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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