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핫이슈

 뉴스초점

 기획특집

 연재

 출판

 소식

 포토뉴스

 타매체 소식

 

테마기획 - 선을 찾아서 ⑬
덕산선감의 자취를 따라


후난성湖南省에 가니
몽둥이질로 일세를 풍미한 덕산德山의 고함 소리가
들리는 듯


최석환(본지 발행인)

후난성(湖南省) 창더시(常德市)에는 지금도 덕산(德山)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게다가 덕산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아침마다 운동을 하며 심신을 단련하고 있다. 그들은 당나라 때 덕산선감(德山宣鑑)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운동 중 간간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고함소리를 들으니 문득 당나라 때 신라승이 덕산선감을 참문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루는 덕산선감이 “오늘 밤에는 묻지 말라. 묻는 자가 있으면 누구든 몽둥이로 30방을 내려치겠다”고 말했다. 이때 한 스님이 앞에 나와 절을 하자 곧바로 몽둥이로 내려쳤다. 그러자 그 스님이 말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왜 때리십니까?”
“너는 어디서 온 중이냐?”
“저는 신라에서 왔습니다.”
“네가 뱃전에 오르기 전에 30방망이를 때려야겠다.”
덕산선감과 신라승이 나눈 선문답이다. 덕산의 몽둥이질[德山榜]은 임제의현의 할(喝)과 함께 선가를 풍미했던 화두로 오늘까지 한·중·일 선가에 자리매김 되었다.

중국이 지방종교정책의 일환으로 새로 건립한 건명사 안내도.
필자는 10여 년 전 후난성을 찾았을 때 가는 곳마다 선기가 넘쳐흐르는 모습을 보고 무척 놀랐다. 덕산선감은 누구던가. 그는 혜능 문하의 석두희천을 개조로 하여 천황도오(天皇道悟) - 용담숭신(龍潭崇信)으로 이어지는 선맥을 이은 인물로 그 밑에 오가칠종 중 운문종과 법안종이 태동하여 선가에 끼친 업적이 크다.
필자가 후난성 창더시를 찾던 날 빗방울이 온 대지를 촉촉이 적셨다. 후난의 성도 창사(長沙)를 기점으로 위산의 밀인사와 협산의 협산사, 창더의 덕산사지를 탐방하게 되었다. 주금강 소리를 들었던 덕산선감은 먼저 창사에서 곧바로 위산으로 달려갔다. 위산은 덕산선감 선사가 바랑을 짊어지고 찾았던 곳이다. 또한 체와 용을 설한 위앙종을 일으키며 선풍을 떨친 곳이다. 필자는 위산에서 위산과 앙산이 나눈 체와 용의 의미를 깨닫고 창사로 빠져나왔다. 다음 날 방(榜)의 선사로 알려진 덕산을 찾아 창더시로 달려갔다. 창더시에 이르니 덕산사는 흔적 없이 사라졌고 그나마 덕산로, 덕산공원이 남아 있어 옛 흔적을 더듬었다. 그중 고봉(孤峯) 탑기에서 옛 덕산의 흔적을 살필 수 있었다. 청가경 원년에 쓰여진 《창더부지(常德府志)》에 ‘옛적 방으로 이름을 떨친 덕산선감이 선법을 널리 떨쳤던 덕산사가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덕산은 쓰촨성 검남 출신이며 성은 주씨로 어려서 출가하여 율장과 《금강경》과 여러 경론을 배워왔다. 그래서 주금강이란 이름으로 불렸을 정도로 《금강경》에 달통했던 그다. 그는 뒤에 용담숭신에게 사사하여 그의 법을 이은 뒤 《금강경》을 잊고 방의 선사로 세상에 알려졌다.
주(周)금강으로 이름을 떨친 덕산은 어떤 계기에서 신주처럼 간직한 《금강경》을 불살라 버렸을까. 그가 주금강이란 명성을 얻게 된 까닭도 덕산의 속명이 주씨라는 데 붙여진 이름이다. 덕산은 용담숭신에게 인가를 받기 전 자신이 태어난 검남 땅에서 《금강경》을 강의하여 명성을 얻었다. 주금강으로 불린 덕산은 하루는 도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터럭에 바다를 삼켜도 바다의 본성은 줄어들지 않고 겨자씨를 바늘에 던져도 바늘 끝의 예리함은 변함이 없다. 배울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나만이 알 수 있다.”
그러던 어느날 덕산선감은 남방에 선종이 흥하다는 소리를 듣고 속으로 불쾌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혼잣말로 말하였다.
“출가자가 천겁 만겁 부처님의 세세한 수행과 몸가짐을 배운다 해도 성불하기 어려운데 남방에서 마구니들이 감히 사람 마음을 그대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된다 하니 그들의 소굴을 파헤치고 씨를 말려 부처의 은혜에 보답하리라”고 결행했다. 그리고 드디어 검남을 떠나 남방으로 가게 되었다. 덕산은 《금강경》 주석서인 《청룡소초(靑龍疏○)》를 짊어지고 촉 땅을 떠나 처음에는 예양에 도착했다.
그때 길가에 떡장수 노파를 보고서 짐을 내려놓고 떡을 사서 점심을 먹으려는데 그 노파가 짐을 가리키며 물었다.
“무슨 책이요?”
“《청룡소초》요.”
“무슨 경을 강론한 책이요.”
“《금강경》이요.”
“내 한 가지 묻겠는데 만일 대답을 한다면 점심(點心)을 드리겠지만 못한다면 다른 데로 가보시오. 경에 이르길 ‘과거심도 불가득이요 현재심도 불가득, 미래심도 불가득[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이라 했는데 스님께서는 어떤 마음에 점 찍으려[點心]하오?”
그때 덕산 스님은 앞이 캄캄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 노파는 이 고을에 용담 선사라는 도인이 있는데 그를 한번 찾아가 보라는 말을 전하고 그에게 점심을 팔지 않았다. 덕산은 그 노파에게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용담숭신 선사를 찾아갔다. 덕산은 용담 선사를 보자마자 화두를 던졌다.
“스님을 용못[龍潭]이라고 들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못은 보이지 않고 용도 나타나지 않는구려.”
그러자 용담 선사는 단박에 일할했다.
“그대는 몸소 용못에 가 보았는가.”
그 말에 덕산은 대답을 잃고 마침내 용담사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밤하늘의 별빛이 초롱초롱한 것을 보고 용담 선사가 덕산에게 말하였다.
“밤이 깊었는데 어찌 내려가지 않는가.”
“안녕히 주무십시오.”
나가다가 다시 돌아서면서 말하였다.
“바깥이 캄캄합니다.”
이에 용담은 촛불을 켜서 덕산에게 건네주었다. 스님이 받아들려는 순간 느닷없이 불어 꺼 버렸다. 그때 덕산 스님이 크게 깨치고 절을 올리자 용담이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가.”
“앞으로 다시는 천하 노스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다음 날 용담 선사가 법상에서 말하였다.
“여기 중(덕산)에는 칼숲과 같고 입은 새빨간 핏덩이 같은 사람이 있는데 한방 쳐도 끄떡도 않는다. 뒷날 그는 우뚝한 산봉우리 위에서도 우리 도를 세워 나갈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인가했다. 그리고 스님은 마침내 법당 앞에 《청룡소초》를 수북이 쌓아놓고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말씀했다.
“현묘한 논변을 다 통달하여도 그것은 허공 속에 있는 터널과 같고 세상의 모든 추기를 다하여도 그것은 큰 골짜기에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다”고 말한 뒤 《금강경》을 불살라 버리고 그 뒤부터 선으로 세상을 펼쳤다.
이 일화는 한국 선가에 회자되면서 한국의 대표적 선승들이 상당법어로 대중을 경책했다. 그중 필자의 기억에 남는 선승으로는 조계종 종정과 봉암사 조실을 지낸 서암 선사로 그의 선어가 머리를 스쳐간다.
“덕산 스님은 《금강경소초》를 쓴 대학자인데 어느 날 용담 선사가 그에게 캄캄한 밤중에 촛불하나를 건네면서 ‘자, 받게’ 했다가 불을 주려는 순간 불을 꺼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 찰나에 활연대오하게 되었습니다. 선이라는 것은 이론이 풍부하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일자무식이라고 해도 깨치면 바로 부처입니다.”
서암 선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덕산 스님의 깨달은 기연을 들어 대중을 경책했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자유인이 되어 위산을 찾아간 덕산선감

위산으로 간 위산촌 학생들.
필자는 10여 전 전 위산을 찾던 날 산문 입구에서 뜻밖의 광경을 보고 놀랐다. 위산의 아랫마을에 초등학생들이 소풍을 나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위산의 역사에 대해 숙제를 낸 것 같았다. 산문의 대련에 ‘법우래형악(法雨來衡岳) 종풍계앙산(宗風啓仰山)’이라 쓰인 위산 밀인사의 역사를 기록했다. 그때 그들을 지켜보면서 중국선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산문에 들어서니 한 스님이 필자를 알아보며 반겼다. 자신은 허베이성 백림선사의 징후이(淨慧) 화상의 제자로 일찍 백림선사에서 필자를 봤고 중국에서 필자의 고명함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렇듯 외국 땅에서 선연을 맺은 것은 필자로선 매우 기쁘고 가슴 벅찬 일이었다.
밀인사 조당 앞에 차나무에서 새순이 올라왔다. 위산은 그것을 놓고 앙산과 체와 용을 논했던 기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찰나에 덕산이 위산을 찾았던 일화가 떠올랐다.
덕산은 용담으로부터 가슴 벅찬 깨달음을 얻고 맨 먼저 위산을 찾아가 시험하려 했다. 위산은 백장의 제자로 위산이 공양주로 있을 때 일찍 대 위산의 주인이 될 것임을 간파한 스님이다. 그런 스님에게 자신의 선지를 드러내 보이는 것은 무엇보다 중국 선계에 두각을 드러내는 좋은 결과임을 덕산은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덕산은 곧장 위산을 찾았다. 필자가 위산을 찾았던 것처럼 산문 안으로 들어가 바랑도 벗지 않고 법당에 들어가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하더니 주위를 둘러보면서 “없구나 없어” 하고는 나가버렸다. 그리고 덕산은 산문 앞까지 나왔다가 “이렇게 싱겁게 굴 일이 아니야” 하고는 몸가짐을 가다듬고 다시 산문 안으로 들어가 위산을 만났다.
새로 건축 중인 건명사. 지금은 창더시의 유명한 사찰로 덕산사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위산은 앉아 있었다. 덕산은 깔개를 집어 들며 “스님” 하고 불렀다. 그때 위산이 불자를 잡으려는데 덕산이 소리를 지르고 소매를 탁탁 털고 나가버렸다. 덕산은 법당을 등지고 짚신을 신자마자 떠나버렸다. 저녁이 되자 위산이 수좌에게 물었다.
“아까 봤던 신참은 어디서 왔느냐?”
“그때 법당을 등지고 짚신을 신더니 떠나갔습니다.”
“그는 뒷날 높은 산봉우리에 암자를 짓고 부처와 조사를 꾸짖으며 살 놈이지.”
뒷날 설두중현은 《송고백칙》에 그때의 화두를 ‘설상가상’이라고 평했다.

 

기사 작성일 : 2011-02-25 오전 11:28:37
기사에 대한 덧글 등록된 덧글 : 0개
이 기사와 관련하여 등록된 덧글이 없습니다.
 
작성자  
제목  
덧글 내용  
비밀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