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핫이슈

 뉴스초점

 기획특집

 연재

 출판

 소식

 포토뉴스

 타매체 소식

 

|선문화 순례|


왕권 다툼 속에 희생된

단종과 정순왕후

김다혜(본지 기자)

청룡사 가는 길.
봄이 오는 길목인 2월의 마지막 주에 12세 어린 나이에 즉위한 단종과 그의 왕비인 정순왕후의 가슴 절절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종로구 숭인동의 청룡사를 찾았다.
가파른 언덕 옆에 주택단지와 동화되어 있는 청룡사는 다른 사찰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게 절이라는 느낌보다는 한옥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청룡사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인 고려 때 창건되었다. 그 창건 설화를 잠시 살펴보자.

신라 말기, 북쪽에서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고, 서쪽에서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는 등 통일 신라는 강토가 다시 셋으로 나누어졌다.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고친 뒤 전왕(前王)의 폐정을 일신하고 정치를 천하공법(天下公法)에 의하여 다스릴 것을 백성 앞에 공약하였다. 이듬해에는 도읍을 송악으로 옮기고, 관제를 개혁함과 동시에 숭불(崇佛)과 융화(融和)를 건국 이념으로 하여 나라의 기반을 닦아 나갔다.
그는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하여 즉위 2년에는 개경에 법왕사를 비롯하여 10개의 사찰을 창건하였다. 그리고 즉위한지 5년에는 개경 송악산에 일월사와 한양 삼각산 자락에 청룡사를 창건하였다. 특히 청룡사는 도선 국사의 유언을 받들어 태조 왕건이 직접 창건하였다. 도선 국사는 왕건이 즉위하기 20년 전에 열반하였다. 그런데 열반하기 전에 왕건의 부친, 왕융에게 유서를 보냈다.
“20년 후에 당신의 아들 왕건이 왕위에 오를 터이니, 즉위 다음 해에는 열 곳에 절을 짓고, 즉위 5년에는 개경에 일월사와 한양에 청룡사를 각각 짓도록 하시오. 그리하면 왕씨의 개경 도읍이 성창(盛昌)할 것이오. 또 개경은 왕씨의 5백 년 도읍지요, 한양은 이씨(李氏)의 5백 년 도읍인바, 한양은 산세가 거악(巨岳)하여 이씨 왕업이 날로 왕성하여지리니, 한양에서의 이씨 지기를 늦추고 왕씨가 번창하게 하려면 한양의 외청룡 산등에 절을 짓고 조석으로 종을 울리도록 하시오.”
이것을 음양도참설에 의하여 풀이하면, 한양의 외청룡 산등이 동방갑을삼팔목(東方甲乙三八木)이라, 즉 순양(純陽)의 나무[木]이니, 순양의 나무가 왕성하면 이씨의 운이 속히 돌아오게 되므로 여기에 절을 짓고 종을 울리면 종소리의 금(金)이 이씨의 목(木)을 누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또 비구니가 이 절에 거주하면 양(陽)의 극치를 막아 왕씨의 5백 년 도읍이 제대로 성창할 수 있으며 이씨의 운을 늦출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실제로 고려를 개국한 왕건은 이씨의 한양 지기(志氣)를 누르기 위하여 한양땅(지금의 수유리 근처)에 오얏나무 수천 주를 심어 놓고 해마다 자라나는 순을 쳐서 더 자라지 못하게 함으로써 이씨의 왕운을 막으려 했다.

정업원 비각이 있는 곳.
거창한 창건 설화를 간직한 청룡사는 그 역사적 사실을 모른 채 찾아가면 ‘이곳이 정말 역사의 현장이기는 할까’하는 의심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처럼 지금 청룡사의 모습은 빽빽한 주택 단지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청룡사 안으로 들어서니 아담한 크기의 절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침 대웅전에서 나오는 관리인에게 청룡사의 얽힌 전설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이곳은 단종의 아내인 정순왕후가 머물렀던 절입니다”라며 청룡사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해주었다. 그리고는 작은 문을 가리키며 저 곳을 통해 나가면 정업원 비각(淨業院 碑閣)을 볼 수 있다고 했다. 허리를 구부려야 겨우 나갈 수 있는 문을 통해 나가면, 잔디밭이 깔려있는 작은 공간을 만날 수 있다. 처음 청룡사에 들어가기 전 청룡사 입구 바로 옆에 출입을 금하는 사당 같은 걸 보았는데, 이제 보니 그 곳이었다. 그 작은 공간 안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씨를 새긴 비석이 있었다. 그 글씨는 영조가 1771년에 단종과 이별한 정순왕후가 이곳 청룡사에서 주지로 지냈다는 사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영조는 이 비석 외에도 ‘전봉후암어천만년(前峰後巖於千萬年)’이라는 비각의 현판 글씨와 ‘세신묘구월육일음체서(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라는 비석의 관서(款書)도 직접 썼다. 뜻은 이곳이 천만 년 동안 영원할 것이며, 단종과 정순왕후의 일을 생각하며 눈물을 머금고 이 글을 쓴다는 것이다.
단종과 정순왕후의 이별이 얼마나 가슴절절한 것이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하길 단종은 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된 불운의 왕이라고 기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3년 전 쯤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하던 청령포에 간 적이 있다. 그때 보았던 청령포는 배를 타지 않고서는 강을 건널 수 없는 아주 작은 섬이었다. 그곳에서는 어린 단종이, 한양 청룡사에서는 어린 왕후가 서로를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단종이 청령포로 유배 떠날 때 정순왕후는 영리교까지 따라 나왔으나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하고 떠나는 님의 뒷모습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가슴 아픈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에 두고두고 오르내렸다고 전한다. 단종과 이별한 정순왕후는 영월 쪽이 가장 잘 보이는 청룡사에 머물면서 출가를 하였다. 허경(虛鏡)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이때 왕후를 수행하여 온 궁녀 5명도 전부 비구니가 되었다. 정순왕후는 바깥세상과 인연을 끊고 절의 어려운 생활을 돕기 위해 댕기·저고리·깃·옷고름·끝동 등의 옷감에 자주물감을 들여서 내다 팔았다. 그렇게 물감을 들일 때 바위 위에 널어 말리곤 하였으므로 바위가 자주색으로 물들어져 그 바위를 ‘자주바위’라 하고, 바위 밑에 있는 우물을 ‘자주우물’이라 하며, 또 그 마을 이름도 ‘자주동’이라 했다.
왕후를 떠나서 어린 나이의 여인에게 이와 같은 현실은 칼날과도 같은 냉혹함 그 자체였다. 치열한 왕위 다툼 속에서 결국은 어린 두 사람이 희생양이 되어야했다. 정순왕후는 양반집 규수에서 한 나라의 국모, 그리고 스님으로 이어지는 운명의 수레를 눈물로 받아드리며 평생 볼 수 없는 님을 그리워하며 65년간을 수도하다가 82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슬픈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청룡사를 둘러보고 나왔다. 그래도 왕후가 한평생 머물렀던 사찰인데, 초라한 모습에 더욱 안타까웠다. 빼곡하게 들어선 주택들과 이제 막 들어선 아파트 단지들을 보면서 도선 국사가 지목한 명당자리가 확실한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역사는 사람들이 기억해 주지 않으면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잊혀진다. 단종의 눈물이 어린 청령포만 기억하는 우리는 단종 못지않게 아픈 가슴을 간직한 정순왕후와 청룡사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기사 작성일 : 2011-03-22 오후 2:51:26
기사에 대한 덧글 등록된 덧글 : 0개
이 기사와 관련하여 등록된 덧글이 없습니다.
 
작성자  
제목  
덧글 내용  
비밀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