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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기행·천운 큰스님

 

 

걸림없는 포교로

 

불빛과도 같은 자비행 실천

 

 

 

최석환 (본지 발행인)

 

천운 스님은 포교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포교의 새바람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포교와 수행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설파, 대중 포교를 앞당기고 있다.

천운 큰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광주 향림사. 70명의 고아가 이 절을 거쳐갔다.


우리 불교사에 있어서 남도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로 풍수지리의 비조 도선을 잉태한 땅이며, 백련결사와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의 깃발과 민중의 미륵 신앙의 발원지가 이곳이다.
게다가 도선, 진각, 혜심, 진표를 비롯, 학명, 만암과 구산, 청화, 천운 큰스님 등이 바로 호남 불교의 새바람을 일으킨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분들의 뜻을 이어 포교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광주와 전남지역을 중심으로 새바람을 주도한 분이 있다. 천운 스님은 벌써 광주에서만 쌓아올린 탑이 30년이라는 연륜이 말해주듯 사회복지와 대중포교를 통해 불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그 덕망이 회자될 정도이다. 스님이 손수 키워온 고아가 70명에 이르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세간 속에 불교를 심는데 앞장 서고 있는지를 실감케 한다.
천운 큰스님은 최근 초의 선사의 다향이 머무르는 대둔사 주지를 맡은 이후 《대둔사지》 번역 출판에 앞장 섰고, 해남 읍내에 5억여 원의 거액을 들여 ‘한듬 어린이집’을 개원하는 등 남도 포교에 스님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지난 달 향림사의 절문 안으로 들어가 스님의 정신세계를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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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욱 스님 문하에서 출가

천운 스님은 1932년 11월 24일 전북 고창군 성내면 월산리 339번지에서 이종협 씨를 부친으로 유각심화를 모친으로 태어났다.
스님의 상좌인 암도(조계종 교육원장) 스님은 “큰스님은 천운을 타고난 분이시고 이 시대가 꼭 필요로 하는 보살의 화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소년기 서당에서 유교 학문을 섭렵한 스님은 16세 때에 어머니를 따라 순창 구암사에서 영호 박한영(映湖 朴漢永) 선사를 만나면서부터 불문에 들게 되었다. 스님은 해방 이듬해인 46년 내장사에서 출가를 하게 되었다. 그 뒤 매곡 스님, 박한영 스님, 안진호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을 만날 수 있는 인연을 얻었다. 그러나 정작 스님을 이끌어 주신 분은 이종욱 스님이었다. 이종욱 스님을 만나게 된 데는 정태혁(동국대) 명예교수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오늘날 스님의 걸림없는 포교방편의 족적을 살펴볼 때 은사 스님인 종욱 스님이 스님에게 설파한 도제양성론이 근간을 이룬다. 스님은 종욱 스님을 은사로 정한 뒤 스님을 따라 월정사 말사인 보문사에서 대교과를 마치고 선방으로 들어갔다.
스님은 당시 전강, 향곡 선사와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도리를 탁마했다. 그러나 첫번째 관문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 화순 용암사에서 수행하던 어느 봄날, 선 삼매에 들었을 때 스님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화두가 풀리면서 무념무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 온 우주가 하나되는 활연대오를 얻었다. 당시 용암사 수행은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었다.


“내가 용암사에서 수행할 때 벽면을 막고 공기밥 하나 들어갈 구멍만 내어 이곳으로 하루 한끼 밥만 받으면서 묵언수행을 했지요. 지독하게 공부만 하다보니 어느날 맹장이 터져 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이곳에서 윤주일 선생이 쓴 《반야심경 해석》을 보다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설명이 내 눈을 번쩍 뜨게 했습니다. 그때 우주와 자연이 하나되는 이치를 깨닫게 되었지요. 색즉시공이라는 것은 우주가 우리의 현상계로 미치니 만법귀일을 말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현상계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마음자리로 들어가게 되는 것을 알게 된 거죠”라며 “수행법에는 공안선이니 염불선이니 주력 등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자기의 체질에 맞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원래 선이란 것은 모든 경을 내던지고 단하 천연 선사처럼 불상을 도끼로 쪼개어 아궁이에 넣고 문자도 말도 없는 경지를 얻어서 바로 사람의 마음을 터득하고, 모든 불경이 가르치는 바를 버려야 별전의 지혜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수행자들이 수마와 색마를 잡지 못하면 성불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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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제자 제접법

천운 스님이 용암사에서 수행할 때 당시 갓 군대에서 제대를 한 암도 스님이 스님을 찾아와 제자되길 간청했다.
처음에는 반대하는 척 하다가 즉시 머리를 깎아 주셨다. 이에 대해 암도 스님은 스님의 제자제접법을 이렇게 설명했다. “닭이 천마리면 그 가운데 봉이 한마리 있다는 말을 믿으신 것 같다”고 했다.
그때 천운 큰스님의 수행담을 암도 스님은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스님을 처음 뵌 것은 전남 화순군 한천면에 있는 용암사였는데 나는 그때 패기만만한 25살이였습니다. 스님은 31살 펄펄 나르는 때였죠. 성질이 어찌나 급한지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움지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주장자가 부러지는 난리가 나고 열흘에 한번씩 삭도로 머리를 깎아야지 그대로 놔뒀다가는 벼락이 떨어졌습니다. 또 워낙 가난한 때라 아침에 죽을 먹고 하루종일 작업을 하고 나면 저녁 예불 끝에 꼭 참선을 시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졸다보면 주장자가 어느새 어깨판을 여지없이 쳐오고 전생에 업이 많아서 수마가 많다는 법문을 귀가 아프게 들었죠.”
스님의 용암사에서의 8년 수행은 달마의 9년 면벽에 버금가는 수행력만큼 힘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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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교의 불모지 광주에서 30년째 전법

천운 스님께서 광주지역을 포교지로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60년대 전라도 출신 스님에게 법문을 듣고 돌아서면 “전라도 개땅 쇠놈이 뭘…”이라고 내뱉는 일이 허다했다. 스님이 다른 지역보다 호남을 포교지로 선택한 것은 바로 이 지역적인 이기주의를 타파, 화해의 길을 모색하고자 한 것에 있었다.
스님은 화엄사(전남 구례) 주지를 한 뒤 곧바로 광주 상무대 건너편에 위치한 치평 산기슭에 향림사를 건립하고 포교를 시작했다. 이곳을 선택한 데는 스님이 향림사 건너편에 위치한 상무대에서 군생활을 한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26년 전에 처음 광주 향림사에 왔을 때 대처승이라고 했고 도둑놈이라고도 했지요. 또한 한글로 법문을 하고 법회에 오락 등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자 미친 놈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지금은 보편화되었지만 당시에는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였어요. 그런데 마침 상무대 군법사가 군법당에서 나의 방식을 받아들여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 뒤로는 신도들이 나를 따르게 되었죠.”
스님은 광주 불교대학, 신협, 유치원 건립으로 종욱 스님의 도제 양성론을 몸소 실천했다. 지금까지 키운 70여명의 고아들이 의사, 박사, 사업가 등 모든 분야에서 골고루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모습에서 스님은 큰 보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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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심의 실천

자비심의 완전한 실천은 대오각성의 경지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견성에 이르지 않고서도 자비행이 우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 도에 이르는 고행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이 주인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은 스스로 주인이기를 포기한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찾고 그 가르침을 쫓는다면 번뇌와 망상이 떨어지게 되고 내 자신이 부처가 되는 거죠.”
천운 큰스님은 자비행의 실천자로서 불자들에게 자신의 진아를 발견할 때 깨달음의 길은 가까워질 수 있다고 설파한다.
스님의 설법 방법은 독특했다. 다른 선사들이 즐겨 쓰는 공안에만 집착하지 않고 신도들이 알기 쉽게 일상생활이 곧 불법임을 간파하신다. 그래서 법회가 있는 날이면 스님을 따르는 불자들이 서울, 부산, 대구 등지에서도 모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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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과 불교는 한몸

스님은 향림사를 광주지역의 법등을 밝히는 전법의 현장으로 만들었고 지난해에는 남도의 끝자락 대둔사 주지로 임명받았다.
취임 이후 본말사 주지 스님에게 “우리는 면 단위까지 포교를 할 수 있는 복지 포교를 해야 합니다”라는 스님의 일성이 있은 9개월만에 해남 읍내에 어린이 집을 개원했고 대둔사의 숙원 사업인 《대둔사지》도 번역, 완간하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지난해 필자와 초의 선사의 생가를 답사, 대둔사의 옛 선사의 법향을 드날리는 일에 정성을 쏟기도 했다.
스님은 대둔사의 주지를 맡고 난 뒤부터 광주뿐만 아니라 남도의 끝자락까지 스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리고 지난해 불교전기 문화연구소가 기획 출판한 《도선국사》에서 도선을 선승으로 복구하는 것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스님의 뜻을 이어 암도 스님은 포교사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석주 스님은 이러한 포교의 큰 산맥은 천운 스님의 자비행의 실천에서 이루어진 결과라 한다.
해방된 후 출가한 스님은 불교정화운동으로 비구대처 싸움속에서 참선의 문에 들어간 화순 용암사에서의 정진이 오늘의 대중포교의 큰 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정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참선, 경전, 주력 등을 가리지 않고 일심으로 정진할 수 있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또한 박한영, 매곡, 안진호, 권상로 스님과 같은 선지식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을 얻어 전강, 향곡 선사를 만난 뒤 선의 법향을 얻었고, 오늘에는 백양산문의 방장 서옹 선사의 율맥뿐 아니라 사상을 계승함으로써 호남 불교의 큰 봉우리로 우뚝 서고 있다.
천운 스님의 불빛과도 같은 자비행의 실천은 호남불교의 극치를 보는 것과 같았다.

-<불교춘추> 11호 참조

기사 작성일 : 2007-10-08 오전 1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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