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핫이슈

 뉴스초점

 기획특집

 연재

 출판

 소식

 포토뉴스

 타매체 소식

 

 

불교의 차문화

1. 한국인의 차 언제 시작 되었는가

지리산 하동 차밭

이 땅에 차가 전래된 시기는 과연 언제부터였는가
차의 전래시기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나 삼한시대에 백산차(白山茶)라고 불리는 차가 있어 토착 우리 차문화가 싹트게 되었다. 또한 수로왕비(首露王妃)인 허황후(許王后)에 의해 인도로부터 차가 전래되었다는 설도 잇다. 이능화의『조선불교통사』에 의하면 "김해(金海) 백월산(白月山)에 죽로차(竹露茶)가 있었는데 세상에는 수로왕비 허씨가 인도로부터 가져온 차종이라고 전해온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이다. 「가락국기」에 이런 말이 전해온다. "수로왕의 17대 손인 갱세(憾世)급간이 661년 조정의 명을 받들어 가락국의 거등왕(巨登王)이 선왕(先王)인 수로왕(首露王)무덤에 제사를 올릴 때 차와 떡 그리고 과일, 밥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또 『삼국사기』신라 흥덕왕 3년(서기828)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해온다.
"대렴이 사신으로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종을 가지고 옴에 왕이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성덕왕 때부터 있었지만 비로소 이 시기에 이르러 성행하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 차 역사를 뒤돌아 볼 때 가락국을 거쳐 삼국시대 말기인 선덕여왕 때 비로소 차가 정착되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또한『삼국유사』에 따르면 매년 삼월 삼짇날 삼화령의 미륵 부처님께 차공양을 올렸던 역사적 사실이 드러난다. 765년 삼월 삼짇날이었다. 신라 35대 경덕왕(景德王742~765)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만월성 귀정문(歸正門) 누(樓)에서 있었다. 그곳이 오늘날 경주문천을 지나 요석궁 좌측에 있는 귀정문이란다. 경덕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귀정문 누에서 말하였다.
"누가 흉흉한 스님 한사람을 데려올 수 있겠는가."
그때였다. 옷을 잘 입은 한 스님이 귀정문 앞을 지나가자 신하들이 그를 데리고 온다.
왕은 그를 보자, 내가 찾던 스님이 아니라면서 그를 물리친다
얼마 후 한 승려가 장삼을 입고 앵통을 걸머지고 남쪽에서 걸어왔다.
왕은 그를 보더니 누위로 맞이했다.
"그대는 누구요."
"저는 충담입니다." "어디서 오는길이요."
"소승은 해마다 삼월 삼짇날과 종구일이면 삼화령의 미륵불께 차 공양을 합니다. 오늘도 차 공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나에게 한사발의 차를 나누어 줄 수 있겠소."
충담은 그 자리에서 자리를 펴고 경덕왕에게 차를 한 사발 대접한다. 그 신비로운 향기가 입가에 감돈다. 왕은 차를 마신 뒤 충담에게 말하길,
"내 들으니 스님은 기파랑을 찬미한 산외가가 그 뜻이 놀랍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러하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하여 백성을 다스릴 편안한 노래를 지어줄수 있겠소."
충담은 즉석에서 노래를 지어 올렸다. 그 노래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라는 안민가(安民歌)였다.
천 년 전 충담이 왕에게 지어올린 안민가 속에 ``답게``라는 말이 오랫동안 구전 되어 회자되고 있다. 마치 흐르는 물처럼 천 년간 맥박처럼 뛴다. 충담의 정신을 이으려는 경주지역 차인들이 80년대 후반 충담 선사의 안민가 속에 녹여 나오는 ``답게`` 정신을 본받고자 들차회라는 개념을 찻자리에 끌어들여 반월성에서 최초의 들차회를 조직했다. 그때가 1989년이었다. 당시 경주차인회장으로 있던 최차난 씨가 조직하여 답게 정신을 본받고자 들차회를 만들었다. 원불교 이성택 교구장은 "우주의 축소판을 찻자리로 끌어들인 최차란의 정신에 놀라웠다"고 말한바 있다. 우연일지 몰라도 석굴암 문수 보살이 들고 있는 찻잔들에서도 신라의 차향을 느낄 수 있고 1974년 충주 안암지에서 출토된 차(茶)가 새겨져 있는 회색토기 발견에서 신라의 차향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런 인연이지 몰라도 충담선사의 차 정신을 더욱 승화되었을 것이다. 또한 경덕왕의 근친되는 김지장 스님이 출가할 때 가지고간 차 씨앗이 오늘날 국화꽃차로 명성을 얻는 위치 또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충담 선사가 올렸던 삼화령이 남산 남동쪽의 미륵불이 앞에 있던 대연화대좌(大蓮華臺座)인지 생의사(生義寺)에서 출토된 미륵삼존이 나은 자리인지는 아직까지 규명되지 않았다. 다만 경주의 민속한자인 윤경열(尹景烈, 82세. 1979년 작고)씨가 남산동 남쪽에 있는 연화대자리를 삼화령 자리로 규정한 이래 지금은 그곳이 삼화령 자리로 굳어진 상태였다. 그 뒤 해마다 삼월 삼짇날만 되면 차인들이 발길이 이어지고 그 대좌 위에 헌다를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처럼 충담의 차 한 잔이 역사 속으로 걸어나와 지금 신라의 차향처럼 천년을 빛나고 있는 까닭이다.
비약하자면 김명배의『한국의 다도문화』에서 당시 충담은 스님이 짊어메고 차를 올린 끽다용 다구인 앵통(櫻筒)의 예를 들어 한국 다도의 창립은 중국이나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한국의 독창적 창안이라고 말한바 잇다.
모든 역사 기록이 견당사 대렴이 당으로부터 차종을 가져와 지리산에 심으니 그로부터 차문화가 정착된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대렴보다 80년 전인 신라 왕손인 지장법사(地藏法師, 696~794) 중국으로 들어갈때 차(茶) 씨앗 외에 황립도(黃粒稻)와 오차송(五 松)을 가지고 들어갔다. 명조 만력(萬曆, 1573~1613)에 편찬한 『구화산지(九華山志)』에 따르면 "나무 줄기가 속이 비어 작은 대나무와 같다고 전하고 김지장이 신라로부터 가져온 차씨"라고 전한다[梗空如 相傳金地藏 携來種].
또한 전당시에 기록된 지장스님의 차시가 전해오는데 동자를 보내며[送童子下山]라는 차시에서도 절절히 차를 노래하고 있었다.
이렇듯 한국 차의 전래사를 밝힐 때 다양한 편련들이 전해오는데 첫째는 중국으로부터 차종을 가져온 경우와 두 번째는 신라로부터 차종을 중국에 전한 경우와 세 번째는『동대사요록』전하는 바와 같이 덴뽀우시대(天平時代) 교우끼(行基, 668~749) 스님이 말세 중생을 위해 차나무를 심었다는 기록도 전해온다. 이렇게 보면 처음에는 차가 궁중에서 쓰여오다가 점차 불교와 점목하면서 종교의식으로 발전되었다. 그 원류는 통일신라말기 구산선문(九山禪門) 조사들이 대거 입당 구법한 뒤에 귀국할 무렵 차와 선을 받아들여 오면서 절정기를 맞는다. 금당다화(錦堂茶話) 석도륜(昔度輪)의 서문에 보면 "나말려초(羅末麗初)의 선종 구산문의 다선의 전성기 때 해운거상 장보고에 의해 촉(蜀)의 몽정차를 무역 했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고 밝혔듯이 구산선문의 조사들이 자연 장보고 선단을 통해 속속 귀국하니 그들이 자연 다선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조주 선사와 법형제 되는 철감도윤 선사가 장보고 선단을 통해 무주로 귀국하니 바야흐로 다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육우의 『다경』에는 차(茶)를 다(茶), 가( ), 설( ), 명(茗), 천( )으로도 불렀다.
차는 처음에는 약용으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음료로 되었는데 우리 차문화의 기원은 신라시대이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발전되어갔다. 그 기반은 불교의 선종 문화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2. 선종차의 전래

차(茶)가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으로 동점되었다는 사실은 대체적 시각이다. 우리 차를 말할 때 1천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정작 차의 연원을 대려면 고작 신라 흥덕왕 때 대렴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차씨를 가져와 지리산 자락에 심은 이후 차문화가 크게 발전되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밖에 차를 말할 때는 최치원의 「진감국사비명」의 ``한명(漢茗)`` 정도를 언급한다. 역사에 비해 너무 자료가 빈약한 것이 우리 차의 현실이다.

 쌍봉사 철감부도

 
필자가 2001년 일본 우라센케의 종장인 센노 소시츠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땅을 밟은 동기가 선조의 자취를 찾아 왔노라고" 말한바 있다. 이유인 즉 선조 센노리큐가 차를 정립하기 이전 김해 지역의 도공들이 대거 사까이 지역으로 몰려왔는데, 그때 차가 도자기와 접촉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 흔적을 찾아 김해 고라이자완(고양이 발톱 할퀸 자국)을 찾아왔다고 센노 소시츠는 말했다. 일본 최고의 우라센케 종장의 일본차가 조선의 영향을 받았다는 폭탄선언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오늘날 일본차의 현실은 어떠한가. 일본에서는 거의 500년간 차의 유파가 형성되면서 크게 발전되어 갔다. 대부분 중국으로부터 연원을 대고 있다. 거의 중국으로부터 직접 차맥이 들어갔다고 말한다. 에이사이선사가 중국에 유학 갔을 때 나무를 가지고 와 일본차의 원조가 되었다고 전한다. 뿐만 아니라 선다일미란 말이 일본 다도의 정신적 기반을 이룬 것은 원오극근 선사가 다선도량으로 개설한 벽암 협산사의 방장이란 편액과 원오극근 선사가 호구소륭에게 준 전다게송 등이 고스란히 일본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그들은 중국 선차가 일본 땅으로 전승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우리 차의 현실은 어떠한가. 구산선문 조사들로부터 차(茶)와 선(禪)이 같이 들어왔으면서도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은 까닭에 신라 흥덕왕 대렴만 읊조리고 있다. 사실 중국 사람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차나 한 잔 마시러 갑시다"가 인사였다. 그 원류는 조주의 끽다거로부터 시작된다. 중국 다도의 조정이 되어 버린 일본 다도는 사실 선차의 시작이 되어 버린 조주와는 별 관련이 없다. 반면 조주선사와의 법형제간인 신라의 철감 선사와는 깊은 인연이 있다. 그래서 일본보다는 한국 차가 더욱 전통성이 강한 것이다. 그러한 연고로 지난해 10월 옛 조주 관음원인 백림선사에 조주선사기념비를 세워 조주정신을 우리가 잇게 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선다기념비에 정혜회상은 이렇게 피력했다.
"한국과 중국은 한 뿌리이니 여기부터 한 집안이며 선종과 법맥 또한 서로 전함이로다."
우리나라에 차가 들어온 천 년 이후 일본보다 먼저 우리의 전통 차맥을 조주원에 복원함으로써 한국차의 조정이 되어 버린 조주백림선사의 조주선다비의 건립 의미는 일본류 중심에서 한국류로 다선의 정통을 뒤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선종과 중국 선차의 관계는 당대 중국 초기 선종사에 있어서 일가를 이룬 정중종의 개조 무상선사로부터 시작하여 철감도윤(徹鑑道允) · 범일(梵日) · 혜철(蕙哲) · 흥척 등 구산선문의 조사들이 선맥 뿐 아니라 차맥까지 이어 왔고 신라 왕자 출신의 고승 지장법사는 중국으로 건너가 지장불차의 명성을 이었다. 송대로 접어들면서 의천대각국사가 입송하여 송나라에서 유행했던 차풍은 고려로 들어온다. 이때 고려 때 유행했던 뇌원차를 송나라로 수출했고 송나라 왕실 어전차인 용봉단차를 고려로 수입하는 등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어 원대로 접어들면서 원대의 임제종을 크게 떨친 석옥청공 선사로부터 태고보우 선사가 들어가 임제의 선맥 뿐 아니라 차맥까지 이어 오기에 이른다.
당 · 송 · 원대에 이르는 동안 한국 선종은 중국 선종과의 독창적 차 정신을 온전히 이어 와 한국 선종에 차선일미의 정신으로 녹아들게 했었다. 우리 차의 원류를 밝히는 첫 번째 시도는 중국 땅에서 만난 다선일미 정신을 세분화시켜 사천성 성도의 정중사 무상과 남전사의 남전보원과 마곡암의 무염 등 한국 선종사에 큰 자취를 남긴 선승들의 선차정신을 살펴보고 태고보우의 선차정신을 살펴봄으로써 한국 차정신이 중국 선승들에게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고자 하는 데에 있다.

3. 선차지법 개창은 신라무상이다

정중무상 선다례

중국에 선법이 신라로 흘러간다는 참설이 유행하던 시절, 사천성 성도를 중심으로 정중종(淨衆宗)을 일으킨 무상선사에 의해 선차는 전성기를 맞는다. 신라승 무상으로부터 시작된 차문화는 마조를 거쳐 선차문화를 이끌어 내며 중국 선차의 체계적인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한다.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774)에는 무주(無住)선사가 동선(董璿)을 시켜서 무상선사에게 차아(茶芽)를 올리니 너무나 기뻐했다는 구절이 보인다. 『역대법보기』에 무주선사가 차를 마시면서 대화하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자.
무주(無住)화상이 차를 마시고 있을 때 그날 막부의 관료와 시랑(侍郞) 30여 명이 예배하고 좌정한 뒤 질문을 했다.
"화상께선 차를 좋아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곧 차를 게송(偈頌)으로 지어 설하였다.
"깊은 골짜기에 신영(神靈)한 약초가 자라서 신기(神機)하게 수도(修道)의 성치를 도와 주었다. 나무꾼이 나뭇잎을 따면 좋은 맛이 흘러 들어 그릇에 넘친다. 정좌하여 망념(妄念)을 가라 앉히니 자기 본성이 마음의 거울에 비친다."

선승들의 끽다거(喫茶去)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역대법보기』일 것이다. 무상과 무주·마조(馬祖)를 차로 연결 짓는 중요한 사실을 살펴볼 때 중국 선차문화의 연원 또한 무상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시다시피 사천성은 차의 고장이다. 그뿐 아니라 티베트까지 차로 연결 짓고 있으니 사천은 차문화의 중심지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사천성의 중심은 성도이다. 성도는 바로 무상선사가 주석한 정중사 터가 있었던 곳이고 무상선사가 천곡산(天谷山)에 은거할 때 무주로부터 차를 맛본 곳이 천곡산이다. 지금은 천성산이 되고 도교유적이 되어 있다. 그 옛날 무상선사가 활동했던 천곡사는 지금의 태안사(泰安寺)라는 설도 있다.
사실 사천성의 성도는 촉나라의 중심지이며, 중국 차문화의 발상지나 다름없다. 그뿐 아니라 선차문화의 발상지로까지 받들었다. 사실 성도 사람들은 차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만큼 성도는 차의 고장이다. 그 연원은 무상으로 시작되어 마조로 이어졌고, 사천성의 차문화는 양자강(揚子江) 차문화로 변화하여 선차문화의 대명사가 되다시피 했다.

4. 조주 끽다거의 법형제 철감의 차 신라로

2001년 10월 19일 하북성 조현 백림선사에서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차나 한 잔 들게[喫茶去]란 화두로 천하 사람들의 눈을 열어 놓았던 조주종심선사(778~897)의 다선일미 정신을 기리는 한·중 선차우호기념비가 백림선사 경내에 건립되었다. 이 비석의 건립배경은 한국 불교의 구산선문 중 사자산문을 연 철감도윤과 법형제간인 조주종심선사의 인연에 따른 것인데 정혜화상의 인사말이 매우 감명 깊다.
"한·중 양국의 뜻을 모아 조주선차기념비를 조주탑 앞에 세우게 된 것은 천추에 길이 남을 역사적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백림선사는 옛 조주 관음원으로 조주선사가 ``끽다거``를 통해 중국사회 전체에 차 정신을 불러 일으킨 계기를 만들었던 인물이었다. 정혜화상은 특히 조주선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사자산문을 연 철감도윤 선사의 법형제간으로 선다일미 정신이 신라로 이어진 것을 볼 때 한국 불교는 중국 불교와 한 뿌리로 매우 인연이 깊다고 말했다.
조주선차비에는 신라 출신의 선승 무상선사의 심인을 받은 제자 마조도일 문하에서 배운 도의·홍척·혜철·무념·범일·현욱·도윤 등 7명의 선승이 총 망라되어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안휘성(安徽省)은 중국 최대의 차밭이 밀집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한국 차문화사에 꼭 짚고 넘어갈 의미가 있는 곳이다. 차인들이 신주 모시듯 하고 있는 ``끽다거(喫茶去)``라는 공안 또한 안휘성 남전사지에서 탄생되었으며, 전남 화순 쌍봉사의 철감도윤선사가 입당하여 안휘성 남전사로 남전보원선사를 참문한 뒤 깨달음을 얻고 법맥뿐 아니라 차맥까지 가지고 온 까닭으로 추앙받고 있는 신라의 지장법사 또한 안휘성의 구화산에 들어가 지장보살의 화신이 되었다. 오늘날 안휘성을 많이 찾는 연유 또한 차문화와 선의 접목에서 찾게 된다.
중국 안휘성 귀지시 남전촌에 자리 잡고 있는 남전사지는 신라의 선승 철감도윤 선사가 남전보원선사를 참문하고 차맥까지 신라땅에 이어 온 까닭으로 차인들에게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끽다거 공안을 통해 차를 대중화시킨 조주종심과 법형제간인 까닭으로 남전사는 차인들의 고향과도 같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신라로부터 가져간 김지장 차가 오늘날 안휘성 구화불차로 명성을 얻고 있고, 중국인들이 신라인들을 매우 흠모했다는 사실로 볼 때 한·중 차문화의 맥락이 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도도히 흐르고 강물처럼 차향이 피어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고 하겠다.

김립지가 찬한 「성주사 사적비」에 차와 향을 받들고 라는 기록이 나온다. 도한 고운 최치원이 찬한 「낭혜화상비」에 ``명발``이 나온다. 그와 같이 무염선사는 차향이 몸소 배어 있는 신라의 지식인으로 다선일미 정신을 올곧이 이어 온 대선승이었다.
중국 선차의 여명을 밝힌 정중사 무상으로부터 조주 끽다거로 유명한 조주종심과 마조의 제자 마곡보철선사에 이르기까지 한국 선승과의 다선일미 정신을 이어 온 사실이 현지 답사에서 확인되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것은 지난해 불교춘추사가 발원하여 백림사에 세워진 조주선다비로 일본인의 자존심을 꺾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선다일미가 일본차의 대명사로 읊조리고 있지만 사실 중국 차 선맥은 거의 신라와 고려 출신의 선승들이 이어 옴을 밝힘으로써 한국 차의 자존심을 세우게 되었다.

기사 작성일 : 2007-04-11 오후 4:33:23
기사에 대한 덧글 등록된 덧글 : 0개
이 기사와 관련하여 등록된 덧글이 없습니다.
 
작성자  
제목  
덧글 내용  
비밀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