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핫이슈

 뉴스초점

 기획특집

 연재

 출판

 소식

 포토뉴스

 타매체 소식

 

 

차에 담긴 미와 선

 

구단(寇丹·中國 國際茶文化硏究會 理事)

차의 선의(禪意)

선문화(禪文化)는 불교의 한 갈래라기보다는 지혜의 사유이자, 생활에 대한 독특한 관찰 방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는 당(唐)·송(宋) 시기에 선풍(禪風)이 크게 진작되어 그 영향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비록 그것이 인도의 선학(禪學)에 뿌리를 두는 것이기는 하지만 중국 본토의 노장(老莊) 사상을 비롯하여 위진(魏晉) 시기의 현학(玄學)과 융합되었고 나아가 유학의 일부 관점이 더해짐으로써 사람들의 세계관, 인생관, 도덕관과 개인의 수양 방식 속에 녹아들어 초월과 해탈의 독특한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은 많은 동방 국가들에 있어서 쉽게 받아들여졌고 또한 영향을 주었다.
원오극근(圓悟克勤·1063∼1135) 선사가 ‘다선일미(茶禪一味)’를 언급한 이후 선과 차는 그림자처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아울러 차에 일종의 숭고한 사명을 부여함으로써 자그마한 찻잎에서 인류의 한 가지 문명을 담고 아울러 사람들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 심(心)과 색(色)의 문제, 사유와 존재 등 근본적 문제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한 잔의 차는 더 이상 생리적 필요에 의해 마시는 음료에 그치지 않게 되었다.
중국에서 파촉(巴蜀) 지방, 즉 오늘날의 사천성(四川省) 일대에서 처음으로 차를 마신 이래 그것이 당대(唐代) 이후에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던 것은 당시의 종교적 분위기와 깊이 연관된다.
선(禪)은 차의 날개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차의 본성이 고요하고 사색적이고 이지적이기 때문이다. 일 년 사계절의 변화가 있는 대자연 속에서 차나무는 영원히 생기발랄한 푸른 빛이며, 사람들은 그 이파리 하나, 순 하나에서 희망을 보면서 이내 평정을 찾게 되는데, 이는 일종의 선의(禪意)이다.

차의 문화적 의미

차는 마치 소리 없는 혈관처럼 세상 사람들에게로 흘러들어 서로 밀접한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 낸다. 현대 사회는 이미 천여 년 전과는 다르게 발전하였다. 농경 중심의 시대에는 방할돈오(棒喝頓悟)의 사변 방식으로 사람들을 깨우칠 수 있었다.
지금 같은 과학과 정보 시대에 있어서 ‘생활선(生活禪)’과 ‘인간선(人間禪)’등이 제기되는 것은 선학(禪學)의 발전임에 틀림없다. 거기에 담긴 의미는 사람들로 하여금 책임을 다하는 가운데서 만족을 느끼고, 의무를 다하는 가운데서 마음의 평정을 찾으며, 경외하는 가운데서 행복을 얻고, 무아(無我) 속에서 진취를 추구함으로써, 개인을 대중 속에 융합시키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의 생활에서 불가결한 차는 가장 훌륭한 매체 가운데 하나로써, 우리가 기꺼이 경험하고 터득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은 차의 어머니다. 물은 투명한 빛을 지닌다. 투명한 빛은 충족을 의미할 뿐 아니라 또한 아무 것도 없음을 의미한다. 만약 한 잔의 차 속에 물과 찻잎이 어우러지면 그것은 마치 푸른 산마루를 날아가는 백로처럼 고결하고 탈속적인 느낌을 주고, 푸른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처럼 그윽하고 유한한 느낌을 주며, 짙은 색 치마에 새겨진 하얀 꽃잎이나 흰 테두리처럼 활발하면서도 또한 정숙한 느낌을 주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한 잔의 차에 담긴 투명한 물은 천지와 우주의 기운이 우리 개개인의 몸 안으로 녹아들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한 잔의 차 속에 담긴 당신은 작은 이파리 하나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당신과 나, 그리고 그가 있기에 우리는 비로소 투명한 찻물 속에서 그윽한 차의 향기를 우려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는 화평, 안정, 원만함으로 흘러넘치게 되는 것이니, 무엇 때문에 같은 지구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겠는가. 물은 가없는 것이고, 찻잎은 낱낱의 것이다. 삶을 사랑하고, 삶을 깨우치고, 삶을 경외하는 것이 ‘생활 속의 선’이 되었다.
다기(茶器)는 차의 아버지이다. 진흙과 불이 어울려 가장 소박한 도기나 자기를 만들어 낸다. 손에 받쳐 들면 대지의 모든 원소(元素)를 받쳐 든 것처럼 된다. 우리 인간의 생명은 짧고 육신은 왜소한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손에 든 찻잔과 끈끈하게 가까워져야만 한다. 쉽게 깨지는 것일 뿐이라거나 그저 차를 담는 용기일 뿐이라고 간주해서는 안된다.
당대에 중국의 조주(趙州) 스님께서 말씀하신 ‘끽다거(喫茶去)’라는 선어(禪語)는 이제껏 쉽게 풀리지 않는 공안으로 전해진다. 필자는 이 분야에 대한 많은 문헌을 살펴보았지만, 아직도 솔직히 말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미 작고하신 한국의 최규용(崔圭用) 선생이 언급한 ‘끽다래(喫茶來)’는 한·중 양국간에 선차 문화가 교류한 기념이 되었다.
그러나 ‘가다[去]’와 ‘오다[來]’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서로 간에 방위의 차이가 있지만, ‘가다’와 ‘오다’가 차를 마시는 것과 무슨 영향 관계를 지니는가? 여기에 대하여 필자는 이런 게송(偈頌)을 지었다.

趙州和尙喫茶去 조주 스님은 ‘끽다거’라 하셨고
韓國茶星喫茶來 최규용 선생은 ‘끽다래’라 하시니
茶碗圓團似明月 찻잔은 마치 밝은 달처럼 둥그니
欲知西北卽東南 서북쪽을 알려면 동남쪽으로 가라.

이 문제에 대하여 본래는 조현(趙縣) 백림사(柏林寺)에 계시다가 지금은 호북성(湖北省) 황매(黃梅) 사조사(四祖寺)에 계시는 정혜 선사(淨慧禪師)께서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끽다거’의 ‘거’는 공간의 전환이나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당하(當下)’를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 음차의 기풍이 얼마나 성행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수행(修行)을 언급함에 있어서도 그것은 ‘빈 것[空]’이 아니다. 남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니, 마치 차를 마셔 보면 맛이 단지 쓴지 저절로 알게 됨과 같은 것이다. 선이란 ‘오고 감’이 없는 것이자, 또한 ‘오고 갈’ 수 있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조주 스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끽다거’이다.”

선공안(禪公案)은 일률적으로 기계적인 풀이를 할 수는 없다. 그것은 개인의 오성(悟性)과 연관되는 것이다.
중국은 지난 세기에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로 거의 1백 년의 세월을 혼란스럽게 지냈다. 차에 담긴 문화적 의미는 선과 전통적 미학 사상을 포괄하여 그 자신의 매력이고, 다른 하나는 한 시대 사람들의 분위기에 가깝다. 20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에 비로소 차는 중국 대륙에서 되살아났다. 더욱이 다선일미에 대한 깨달음과 실천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의 차인들은 오늘날 중국의 경우보다 더 깊이 있게 연구하였다. 여기에는 역사적 요인 이외에도 사회경제적 측면 등 다양한 까닭이 있다. 그러나 중국은 차의 종주국이다. 오랜 음차의 역사, 차 품종의 다양함, 많은 민족의 음차 풍속 등에 있어서 중국은 다른 나라에 견주기 어렵다. 중국의 차인들은 열심히 노력을 경주하는 중이다.
다실, 선의 경지를 갖춘 작은 공간

문인 사대부와 스님이 서로 밀접하게 교류하고 아울러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위(魏)·진(晉) 시기 이래로 형성된 전통이었다. 스님들은 시를 짓고, 명사들은 선수행을 함으로써 승려의 세속화와 문인 사대부의 승려화 풍조가 대대로 이어졌다.
스님들이 시를 통하여 선을 깨우치고, 문인 사대부가 선을 시에 융합시킨 것은 흔히 자신의 인격적 형상의 완전무결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진(晉) 이후로 왕희지(王羲之), 도연명(陶淵明), 사령운(謝靈運), 이백(李白), 두보(杜甫), 왕유(王維), 백거이(白居易), 소동파(蘇東坡), 육유(陸游) 등의 대가들 가운데는 선종의 영향을 받지 않았거나 차를 애호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시원한 바람은 솔숲과 대숲을 스치고, 맑은 시냇물은 어지럽게 널린 돌 사이로 흐르고, 찻물을 끓이는 달구어진 석탄은 연기와 더불어 부드럽게 춤추는데, 그윽한 차향이 사람들의 생각을 아득한 허공으로 인도하니, 그것은 바로 선의(禪意)이다.
만약 차를 파는 다정(茶亭)에서라면 대나무 표주박의 물 따르는 소리, 솥 단지 안의 물소리, 꽃꽂이와 정갈하고 우아한 다구, 공기 속에 그윽이 감도는 차향이나 단향(檀香)의 느낌은 눈, 귀, 입, 코의 보고 느낌을 하나로 모은다. 이것이 바로 부박하고 소란스러운 도시 속의 작은 정토이며 선의 경지를 갖춘 작은 공간인 것이다. 사람들이 애써 이런 모든 것을 만들고, 맛보려는 것은 역사와의 시간적 공간적 거리를 좁히고, 시끄러운 세상을 잠시나마 초월함으로써 우리들의 몸과 마음으로 하여금 고요하고도 예지로운 생각을 불러들임으로써 스스로의 믿음과 분발을 얻으려는 것이다.
찻물에 퍼지는 찻잎을 한번 꼼꼼히 살펴보라. 마치 삶을 끝내면서 모든 것을 바쳐 타인을 건강하고 즐겁고 발전하게 만드는 것만 같다. 찻잎은 차의 세계에 있어서 열반에 드는 것이다.
중국 고유의 도가(道家)에서 ‘무(無)’와 외부에 의해 전래되어 융합된 불교의 ‘공(空)’이라는 두 가지 관념은 서로 교류하고 흡수하고 어울리고 융합하여 동아시아 민족의 심미관을 이루었다. ‘열반(涅槃)’은 수행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완전무결하며 가장 높은 경지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무’와 공’의 것이다. 선가(禪家)에서는 ‘고요함[靜]’과 ‘맑음[淸]’이라는 두 글자를 표현해 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선과 차의 최고 경지를 ‘청화예락(淸和禮樂)’으로 개괄하고, 일본에서는 ‘화경청적(和敬淸寂)’이라는 네 글자로 귀납하여, 다도 정신에 담긴 심미적 의미를 반영하였다. 도가에서의 ‘청정자재(淸淨自在)’, 불교에서의 ‘반야청정(般若淸靜)’, 유가에서의 ‘청심과욕(淸心寡慾)’의 경우처럼 ‘청(淸)’의 심미 의식은 ‘무(無)’와 ‘공(空)’처럼 풍부하다. 심오한 현담(玄談)을 일러 ‘청담(淸談)’이라고 하고, 사람의 기질과 품격을 일러 “청(淸)한 사람은 귀하고, 탁(濁)한 사람은 천하다.”고 하였다.
또 “나무가 청하면 인(仁)하고, 불이 청하면 예(禮)하고, 쇠가 청하면 의(義)하고, 물이 청하면 지(智)하고, 흙이 청하면 사(思)하다.”고 하였다. 차의 경우는 이런 다섯 가지 청을 한 몸에 지닌다.
다실(茶室)에서 청신한 음악, 청아한 서화(書畵), 청신한 다구, 청례(淸禮)한 대화와 함께 하는 것은 마음을 깨끗하게 수행함에 있어서 선행되어야 할 주변적 요소이다. 다실 안팎을 막론하고 차를 마심으로써 마음을 수양하고, 마음을 수양하는 가운데 차를 마신다. 사회라는 존재가 사람의 사고와 의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본래 동양인들이 이끌던 인문학이 서양인들이 중시한 자연과학에 의하여 무너짐으로써 사람들은 다원적 문화 속에서 정신적 믿음을 지탱하고 심리적 평형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점점 많은 세상 사람들이 동양의 차를 즐긴다. 비록 한 잔의 차에 불과하지만, 차는 동양문화의 정수가 담긴 것이기에 단순한 갈증 해소 음료의 차원을 넘어섰다. 맑고 깨끗한 생각을 지니고서 차를 대할 때, 차는 선의(禪意)로 가득한 깊은 우물처럼 맑고 고요하고 향기롭고 담박하다. 그리고 그것을 얼마만큼 긷던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맺음말

차는 자신의 뿌리를 대지에 튼튼히 내리고 천지일월의 정화를 흡수하고 있으니, 그 자체가 곧 아름다움이다. 차는 또 여러 가지 가공을 거쳐 담박한 물 속에서 다시 살아나 헌신하니, 이는 보고 느낄 수 있는 일종의 윤회인 것이다.
기실 한 개인은 곧 찻잎 하나와 같은 것이다. 사람은 일평생을 살아가면서 매순간 변화하는데 한 개인에게 있어서 그런 과정은 6, 70년이 소요된다. 1백 년이라는 세월은 쉽게 깨닫고 살피기에는 어렵다. 차에 담겨 있는 아름다움은 우리들의 주변에서 시시각각으로 펼쳐진다. 선의 경지와 정신을 발견하고 체득하고, 사유의 즐거움과 내면적 수확을 깨닫고, 회심의 미소를 얻는 것, 그것이 바로 차에 담겨 있는 미(美)와 선(禪)인 것이다.

단행본《다선일미》참조

기사 작성일 : 2007-04-12 오후 5:45:58
기사에 대한 덧글 등록된 덧글 : 0개
이 기사와 관련하여 등록된 덧글이 없습니다.
 
작성자  
제목  
덧글 내용  
비밀번호